DNA로 숨은 범인 찾아낸다
살인, 방화,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 해결의 열쇠는 DNA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수록 광역기동화하는 강력범죄의 실마리를 푸는 유일무이한 단서가 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자연히 DNA 관련 수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지원하고 조율하는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다.
"미제사건 해결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DNA분석실 직원들이 DNA 신원확인정보 시스템 화면 아래에서 각오를 다졌다. 왼쪽부터 김희준 주무관, 윤신규 DNA분석실장, 윤태일 경장, 양채공 경위. |
경찰청 수사국 과학수사센터 내 과학수사계 DNA분석실. 아침부터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하는 윤태일(39) 경장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많이 올라왔네….”
모니터 화면을 보며 부지런히 정보 분류작업을 하던 윤 경장이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는다. 화면엔 전국 일선 경찰서가 검거해 구속된 강력범죄 피의자들의 이름이 즐비하다.
윤 경장이 접속한 프로그램은 경찰청 ‘DNA 신원확인정보 시스템’이다. 이 프로그램엔 전국 경찰서에서 처리된 강력사건의 종류와 일시, 해당 사건 구속 피의자의 신원과 DNA 채취 상황 등이 실시간 등록된다. 그가 하루에 확인하는 사건 피의자만 해도 40~50명. 엄밀히 말하면 이는 전국 경찰서가 해당 사건 피의자의 DNA를 채취해 등록한 건수다.
윤 경장을 포함한 5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는 DNA분석실은 지난 7월 1일 신설됐다. 7월 26일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DNA법)의 시행에 앞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일선 경찰서 간의 DNA 감식 및 신원확인 업무를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DNA 신원확인정보의 데이터베이스(DB)화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됐다.
DNA분석실의 핵심 업무는 ‘강력 범죄자 DB 구축’
DNA법은 살인, 강간·추행, 아동·청소년 성폭력, 강도, 방화, 약취·유인, 상습폭력, 조직폭력, 마약, 특수절도, 군 형법상 상관 살해 등 주요 11개 혐의의 범죄를 저질러 구속된 피의자의 DNA를 채취해 영구 보관할 수 있게 한 것이 골자다. 이에 따라 과거 미제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나 정액 등의 증거와 DNA 대조를 통해 ‘숨은 범인’을 찾아내는 수사가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강호순을 비롯해 8세 여아를 무참히 성폭행한 조두순,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 등 초대형 강력범죄자들의 DNA 정보도 영구 보존돼 추가 범행이 드러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특정 강력범죄자들의 DNA DB 구축’을 DNA분석실의 핵심 업무라고 밝힌 윤신규 DNA분석실장도 DNA법 시행에 따른 미제사건 해결효과를 톡톡히 실감하고 있다.
“11월 18일까지 경찰이 2천5백여 명의 DNA를 채취했는데 이를 통해 3백70건(2백51명)의 미제사건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DNA법이 시행되면서 특정 강력범죄자들의 DNA를 채취해 이를 DB로 구축할 수 있게 됐고, DB 구축 과정에선 과거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DNA 자료와 대조해 상당수의 미제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DNA 신원정보 활용으로 지금은 여죄가 드러나는 단계지만 향후 수년 내에 수만 건의 특정 강력범죄자의 DNA 신원확인정보에 대한 DB가 구축되면 강력범죄 현장에서 바로 용의자를 추려내는 일도 가능해질 겁니다.”
윤 실장은 DB 구축이 수사의 효율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범죄 예방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강력범죄는 재범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해당 전과자들은 자신의 DNA가 영구 보존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죠. 범죄 억제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DB 구축으로 수사 효율성 및 범죄 예방 기여”
"오늘도 강력범죄 피의자들의 DNA가 많이 채취됐군." 윤신규 DNA분석실장과 윤태일 경장이 경찰청 DNA 신원확인정보 시스템에 새로 등록된 강력범죄 피의자들의 DNA 채취 현황을 확인하고 있다. |
DNA분석실은 DNA 채취와 감식 및 신원확인 단계에서 일선 경찰서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간에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서는 해당 피의자의 DNA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밀 감식을 의뢰한다. 감식이 끝나면 경찰서로 결과가 통보돼 피의자가 확실히 범행에 연루됐는지 여부가 밝혀진다.
이 과정을 통해 피의자의 DNA 정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감식센터에 보존, 축적되는데 여기서 DNA분석실이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선 경찰서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채취한 DNA 시료를 분석 의뢰하면 DNA분석실은 해당 피의자의 인적사항을 분리하고 DNA 시료 식별코드(예 201009******)만 부여해 감식을 의뢰하는 것이다.
DNA법엔 DNA 신원확인정보 관리와 이용에 있어서 개인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룰’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DNA분석실이 경찰서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식별코드만 붙여 감식 의뢰된 DNA 시료를 DNA 분석이 끝나면 숫자 및 문자 부호로 변환해 보관한다.
윤 실장은 “DNA 신원확인정보 DB가 일선 수사에서 효율적으로 이용되도록 하는 동시에 인권을 보호하며 보존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곳이 DNA분석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DNA 신원확인정보 DB제도에 강한 신뢰감을 보였다.
“약 5백만명 이상의 DNA 정보를 구축하고 있는 영국이나 6백70만명 이상의 DB를 갖춘 미국의 예를 보면 흉악범죄 대처에서 이 제도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인터폴 자료에 따르면 영국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미제사건 31만3천9백72건의 34퍼센트인 10만6천9백2건을 DNA 신원확인을 통해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