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속살’ 금빛 노을에 철새들이 춤춘다
[감성여행] 순천으로 떠나는 가을 제철여행
계절이 지나는 하늘엔 대상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설악의 대청봉에는 첫눈이 내렸고 먼 데서 불어오는 바람은 때론 지나치게 쌀쌀맞다. 속절없이 지나는 계절이 못내 아쉽다면 남도로 달려간다. 순천만의 장엄한 일몰 앞에서 숨죽여 감동하고 고즈넉한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남도가 차려놓은 푸짐한 밥상으로 헛헛한 속을 달래 본다.
제철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기에 꼭 가 봐야 하는 여행지라는 뜻인데 이맘때의 순천만이 그러하다. 세계 5대 연안습지라거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지로 지정돼 있다는 장황한 수식어가 아니라도 약 2.3제곱킬로미터(70만 평)에 이른다는 그 광활한 갈대밭과 또 그것의 몇 배에 이르는 갯벌 그리고 그 위로 날아들기 시작하는 온갖 철새들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매력적인 곳이 바로 순천만이다.
이제 곧 가을을 떠나보내려는 순천만의 갈대밭은 온통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붙은 갈대는 갯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낭창거리길 멈추지 않는다. 순천만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대대포구에서 출발하는 생태탐사선에 몸을 실어야 한다.
구불구불 요동치는 갯골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목선에 올라 해설사가 나눠 주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다음 눈과 마음을 열어 놓으면 이곳 갯벌이 내주는 풍경이 스윽 다가온다. 웃자란 갈대밭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오리 떼와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먹이를 기다려 누군가는 모형으로 오해한다는 왜가리들을 지나 한 무리의 흑두루미 가족과도 만난다.
흑두루미는 세계적으로 1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희귀조. 지난해에는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6백61마리의 흑두루미가 이곳 순천만에서 겨울을 났단다. 지난 10월 24일 1마리를 시작으로 이튿날엔 9마리가 관측되면서, 올해 이곳에서 월동하는 흑두루미는 모두 7백여 마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순천시도 이 귀한 손님들을 위해 비상(飛上)에 방해되는 전봇대 2백80여 개를 뽑아냈다 하니 노력이 대단하다.
탐사선을 타고 보는 왜가리·흑두루미
고니 떼도 보인다. 갯벌에서의 목욕을 꽤나 좋아하는지 몸이 온통 흙투성이다. 갯벌에서 뒹굴다가 바로 앞 물길로 뛰어들어 참방이며 요란하게 몸을 씻는 모양새가 우습다. 순천만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들은 아직 탐사선의 엔진 소리가 낯선지 배가 가까이 가자 뻘 위를 다다다다, 달려가 훌쩍 날아오른다.
순천만 생태탐사선을 타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예약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승선권을 살 수 있는 데다, 순천만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인원과 운항 횟수를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이다. 순천만 생태탐사선은 오전 9시10분부터 25분 간격으로 다닌다. 하지만 물때에 따라 뱃시간이 탄력적으로 조정되니 홈페이지를 통해 운행시간을 알아봐야 한다.
어린아이와 함께라면 귀여운 갈대열차도 좋다. 대대포구에서 문학관까지 왕복 2.6킬로미터의 짧은 길을 운행하고 <무진기행>의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 등 순천만을 노래한 작가들의 기념관에도 들러 볼 수 있다. 갈대열차는 오전 9시20분부터 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참으로 우습게 생겼다. 머리 꼭대기 옆으로 붙은 작은 눈알은 툭 튀어나왔고 짧고 둥근 주둥이에 볼록한 배와 펄럭이는 등지느러미를 가졌다. 다 자라면 어른 손 반 뼘 정도의 크기인데 공기호흡을 하기 때문에 갯벌에 구멍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물고기임에 틀림없는데도 ‘다리’가 있어 뻘을 살금살금 기어 다닌다. 이 야릇한 생김새와 습성을 지닌 것이 뭔가 했더니 바로 짱뚱어다.
언젠가 서해의 갯벌에서 한 노인이 낚시로 짱뚱어를 잡는 것을 본 적 있다. 그는 빈 낚싯대를 갯벌을 향해 쉭쉭 소리 내며 휘둘렀는데, 놀랍게도 바늘에는 짱뚱어들이 한 마리씩 매달려 있었다. 단지 꿰인 부위가 달랐다. 배에도 걸리고 지느러미나 옆구리에도 걸렸다.
아무리 봐도 갯벌에는 움직이는 것 하나 보이지 않건만 노인은 귀신처럼 잡아내는 것이었다. 30분도 되지 않아 노인이 가져온 커다란 양은 냄비가 짱뚱어로 가득 찬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경이로운 일이긴 하다(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훌치기’라는 낚시법이다).
별미 짱뚱어탕과 푸짐한 남도밥상
뻘 좋아하는 짱뚱어이다 보니 게와 꼬막 등과 함께 순천만을 대표하는 갯벌 생물 중 하나로도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이 짱뚱어로 끓여 낸 얼큰한 탕 한 그릇은 식도락가라면 순천만 여행 중 놓치지 말아야 한다. 순천만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별량면사무소 앞에 짱뚱어탕으로 유명한 ‘욕보할매집’이 있다.
시래기에도 등급을 준다면 이 집 시래기는 단연 1등급이다.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식감이 잘 살아 있는 맛이다. 국물은 또 어떠한가. 보기엔 부담스러울 만큼 진하지만 맛은 의외로 담담하고 향이 좋다. 뚝배기 안에서 짱뚱어 살을 찾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이미 국물 속으로 모두 ‘용해’되어 그 잔해는 찾아보기 힘들다(대신 짱뚱어의 향과 영양가는 그대로다!).
온전한 짱뚱어의 원형을 눈으로 보며 맛보려면 생물 짱뚱어로 전골을 끓여내는 여름에나 가능하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짱뚱어들은 갯벌 아래 2미터 깊이까지 뚫고 내려가 봄까지 길고 긴 겨울잠을 잔단다. 그러니까, 요즘 순천만의 갯벌에서 눈에 띄는 짱뚱어들은 죄다 바람난 녀석들이란 얘기다.
한 가지 더, 욕보할매집에서 짱뚱어탕을 먹다가 빨간 옷을 입은 할매께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얻어먹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다시 한 번 식당 이름을 들여다볼 것.
푸짐한 전라도의 밥상이 그립다면 풍덕동 ‘싸목싸목 해파랑’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한식집을 찾아 본다. 순천의 땅과 바다에서 나는 신선하고 깨끗한 식재료를 가지고 어머니의 손맛으로 ‘징허게 맛난’ 음식들을 차려 낸 ‘미인밥상’을 받아 볼 수 있다. 천천히, 느릿느릿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역 말인 ‘싸목싸목’은 순천의 공동 음식브랜드이기도 하다.
주인장에게 청을 넣어 코스처럼 나오는 것을 부득이 한 상에 차려 달라 했다. 고운 빛깔 호박죽을 시작으로 생선회와 멍게, 생굴 등을 함께 올린 접시와 송이버섯을 깔고 앉은 떡갈비, 얌전하게 부쳐 낸 모듬전과 향 좋은 더덕구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 진동하는 잡채, 짚 대신 오이를 둘둘 말고 등장한 낙지호롱, 전복구이, 먹음직스럽게 부친 문어숙회무침, 발갛게 달달 볶은 주꾸미볶음, 순천만의 갯벌이 자랑하는 꼬막 찜과 쌉싸래한 맛이 일품인 갓으로 담근 물김치, 순천 사람들의 차례상에 꼭 올라간다는 민어구이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뭣부터 먹어야 하나 잠깐 멈칫하다 젓가락은 삼합 접시를 향해 달려간다. 잘 삭은 홍어 한 점, 비계마저 폭신하게 잘 삶아 낸 돼지고기 한 점에 칼칼한 남도식 김치 쭉 찢어 한 점 올려놓고, 조물조물 양념 넣어 무쳐 낸 새우젓 조금에 화룡점정의 역할을 해 줄 청량고추 하나 함께하면 순천의 맛은 이미 완성이다.
마음을 내려놓은 송광사의 하룻밤
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교와는 상관없이 산사에서의 하룻밤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마음속이 어지럽거나 너무 많은 생각이 짐이 되거나, 허한 속 탓에 마음 둘 곳을 못 찾을 때가 그러하다. 그럴 때면 고요한 산사를 찾아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도움이 된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송광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단풍 물든 오래된 벚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간 후 일주문을 지나 다시 1.4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 들어가면 절집이 나온다. 따끈한 온돌방에 짐을 풀고 스님이 나눠 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절 생활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나면 마음 씻기 시작이다.
해질 무렵 거대한 법고의 울림을 시작으로 하는 송광사의 예불은 특히나 장엄하다. 실제 송광사의 법고소리는 굉장히 유명해 이것만 듣기 위해 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기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마치 춤을 추듯 북을 두드리는 젊은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과 그 소리는 절로 마음을 가다듬게 만든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 끼를 나누는 발우공양과 스님과 함께 차를 우려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다도 등을 마치면 잠자리에 들 시간. 도시 생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른 시간이지만 낯설고 긴장된 반나절을 보낸 후인지라 이내 단잠에 빠져든다. 그러기도 잠깐, 달빛 아래 고즈넉한 평온이 찾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도량석이 울려 퍼진다.
새벽 3시. 혼미한 정신으로 옷을 챙겨 입고 댓돌 아래 내려선 순간, 쏟아져 내릴 듯 가득한 밤하늘의 별 무리에 덜 깬 잠이 홀딱 달아난다. 저토록 많은 별을 본 때가 언제였던가.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위클리공감]
순천만의 가을 노을이 홍시 속살처럼 붉게 타오른다. |
제철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기에 꼭 가 봐야 하는 여행지라는 뜻인데 이맘때의 순천만이 그러하다. 세계 5대 연안습지라거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지로 지정돼 있다는 장황한 수식어가 아니라도 약 2.3제곱킬로미터(70만 평)에 이른다는 그 광활한 갈대밭과 또 그것의 몇 배에 이르는 갯벌 그리고 그 위로 날아들기 시작하는 온갖 철새들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매력적인 곳이 바로 순천만이다.
이제 곧 가을을 떠나보내려는 순천만의 갈대밭은 온통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붙은 갈대는 갯벌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낭창거리길 멈추지 않는다. 순천만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대대포구에서 출발하는 생태탐사선에 몸을 실어야 한다.
구불구불 요동치는 갯골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목선에 올라 해설사가 나눠 주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다음 눈과 마음을 열어 놓으면 이곳 갯벌이 내주는 풍경이 스윽 다가온다. 웃자란 갈대밭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오리 떼와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먹이를 기다려 누군가는 모형으로 오해한다는 왜가리들을 지나 한 무리의 흑두루미 가족과도 만난다.
흑두루미는 세계적으로 1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희귀조. 지난해에는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6백61마리의 흑두루미가 이곳 순천만에서 겨울을 났단다. 지난 10월 24일 1마리를 시작으로 이튿날엔 9마리가 관측되면서, 올해 이곳에서 월동하는 흑두루미는 모두 7백여 마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순천시도 이 귀한 손님들을 위해 비상(飛上)에 방해되는 전봇대 2백80여 개를 뽑아냈다 하니 노력이 대단하다.
탐사선을 타고 보는 왜가리·흑두루미
고니 떼도 보인다. 갯벌에서의 목욕을 꽤나 좋아하는지 몸이 온통 흙투성이다. 갯벌에서 뒹굴다가 바로 앞 물길로 뛰어들어 참방이며 요란하게 몸을 씻는 모양새가 우습다. 순천만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들은 아직 탐사선의 엔진 소리가 낯선지 배가 가까이 가자 뻘 위를 다다다다, 달려가 훌쩍 날아오른다.
순천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생태탐사선. |
순천만 생태탐사선을 타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예약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승선권을 살 수 있는 데다, 순천만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인원과 운항 횟수를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이다. 순천만 생태탐사선은 오전 9시10분부터 25분 간격으로 다닌다. 하지만 물때에 따라 뱃시간이 탄력적으로 조정되니 홈페이지를 통해 운행시간을 알아봐야 한다.
어린아이와 함께라면 귀여운 갈대열차도 좋다. 대대포구에서 문학관까지 왕복 2.6킬로미터의 짧은 길을 운행하고 <무진기행>의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 등 순천만을 노래한 작가들의 기념관에도 들러 볼 수 있다. 갈대열차는 오전 9시20분부터 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참으로 우습게 생겼다. 머리 꼭대기 옆으로 붙은 작은 눈알은 툭 튀어나왔고 짧고 둥근 주둥이에 볼록한 배와 펄럭이는 등지느러미를 가졌다. 다 자라면 어른 손 반 뼘 정도의 크기인데 공기호흡을 하기 때문에 갯벌에 구멍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물고기임에 틀림없는데도 ‘다리’가 있어 뻘을 살금살금 기어 다닌다. 이 야릇한 생김새와 습성을 지닌 것이 뭔가 했더니 바로 짱뚱어다.
언젠가 서해의 갯벌에서 한 노인이 낚시로 짱뚱어를 잡는 것을 본 적 있다. 그는 빈 낚싯대를 갯벌을 향해 쉭쉭 소리 내며 휘둘렀는데, 놀랍게도 바늘에는 짱뚱어들이 한 마리씩 매달려 있었다. 단지 꿰인 부위가 달랐다. 배에도 걸리고 지느러미나 옆구리에도 걸렸다.
아무리 봐도 갯벌에는 움직이는 것 하나 보이지 않건만 노인은 귀신처럼 잡아내는 것이었다. 30분도 되지 않아 노인이 가져온 커다란 양은 냄비가 짱뚱어로 가득 찬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경이로운 일이긴 하다(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훌치기’라는 낚시법이다).
별미 짱뚱어탕과 푸짐한 남도밥상
뻘 좋아하는 짱뚱어이다 보니 게와 꼬막 등과 함께 순천만을 대표하는 갯벌 생물 중 하나로도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이 짱뚱어로 끓여 낸 얼큰한 탕 한 그릇은 식도락가라면 순천만 여행 중 놓치지 말아야 한다. 순천만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별량면사무소 앞에 짱뚱어탕으로 유명한 ‘욕보할매집’이 있다.
시래기에도 등급을 준다면 이 집 시래기는 단연 1등급이다.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식감이 잘 살아 있는 맛이다. 국물은 또 어떠한가. 보기엔 부담스러울 만큼 진하지만 맛은 의외로 담담하고 향이 좋다. 뚝배기 안에서 짱뚱어 살을 찾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이미 국물 속으로 모두 ‘용해’되어 그 잔해는 찾아보기 힘들다(대신 짱뚱어의 향과 영양가는 그대로다!).
온전한 짱뚱어의 원형을 눈으로 보며 맛보려면 생물 짱뚱어로 전골을 끓여내는 여름에나 가능하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짱뚱어들은 갯벌 아래 2미터 깊이까지 뚫고 내려가 봄까지 길고 긴 겨울잠을 잔단다. 그러니까, 요즘 순천만의 갯벌에서 눈에 띄는 짱뚱어들은 죄다 바람난 녀석들이란 얘기다.
한 가지 더, 욕보할매집에서 짱뚱어탕을 먹다가 빨간 옷을 입은 할매께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얻어먹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다시 한 번 식당 이름을 들여다볼 것.
한 상 가득 차려진 순천의 미인밥상. 남도의 들과 바다의 진미가 모두 모였다. |
푸짐한 전라도의 밥상이 그립다면 풍덕동 ‘싸목싸목 해파랑’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한식집을 찾아 본다. 순천의 땅과 바다에서 나는 신선하고 깨끗한 식재료를 가지고 어머니의 손맛으로 ‘징허게 맛난’ 음식들을 차려 낸 ‘미인밥상’을 받아 볼 수 있다. 천천히, 느릿느릿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역 말인 ‘싸목싸목’은 순천의 공동 음식브랜드이기도 하다.
주인장에게 청을 넣어 코스처럼 나오는 것을 부득이 한 상에 차려 달라 했다. 고운 빛깔 호박죽을 시작으로 생선회와 멍게, 생굴 등을 함께 올린 접시와 송이버섯을 깔고 앉은 떡갈비, 얌전하게 부쳐 낸 모듬전과 향 좋은 더덕구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 진동하는 잡채, 짚 대신 오이를 둘둘 말고 등장한 낙지호롱, 전복구이, 먹음직스럽게 부친 문어숙회무침, 발갛게 달달 볶은 주꾸미볶음, 순천만의 갯벌이 자랑하는 꼬막 찜과 쌉싸래한 맛이 일품인 갓으로 담근 물김치, 순천 사람들의 차례상에 꼭 올라간다는 민어구이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뭣부터 먹어야 하나 잠깐 멈칫하다 젓가락은 삼합 접시를 향해 달려간다. 잘 삭은 홍어 한 점, 비계마저 폭신하게 잘 삶아 낸 돼지고기 한 점에 칼칼한 남도식 김치 쭉 찢어 한 점 올려놓고, 조물조물 양념 넣어 무쳐 낸 새우젓 조금에 화룡점정의 역할을 해 줄 청량고추 하나 함께하면 순천의 맛은 이미 완성이다.
마음을 내려놓은 송광사의 하룻밤
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교와는 상관없이 산사에서의 하룻밤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마음속이 어지럽거나 너무 많은 생각이 짐이 되거나, 허한 속 탓에 마음 둘 곳을 못 찾을 때가 그러하다. 그럴 때면 고요한 산사를 찾아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도움이 된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송광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단풍 물든 오래된 벚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간 후 일주문을 지나 다시 1.4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 들어가면 절집이 나온다. 따끈한 온돌방에 짐을 풀고 스님이 나눠 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절 생활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나면 마음 씻기 시작이다.
순천 선암사에 있는 승선교. |
해질 무렵 거대한 법고의 울림을 시작으로 하는 송광사의 예불은 특히나 장엄하다. 실제 송광사의 법고소리는 굉장히 유명해 이것만 듣기 위해 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기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마치 춤을 추듯 북을 두드리는 젊은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과 그 소리는 절로 마음을 가다듬게 만든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 끼를 나누는 발우공양과 스님과 함께 차를 우려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다도 등을 마치면 잠자리에 들 시간. 도시 생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른 시간이지만 낯설고 긴장된 반나절을 보낸 후인지라 이내 단잠에 빠져든다. 그러기도 잠깐, 달빛 아래 고즈넉한 평온이 찾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도량석이 울려 퍼진다.
새벽 3시. 혼미한 정신으로 옷을 챙겨 입고 댓돌 아래 내려선 순간, 쏟아져 내릴 듯 가득한 밤하늘의 별 무리에 덜 깬 잠이 홀딱 달아난다. 저토록 많은 별을 본 때가 언제였던가.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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