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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 광장에서 울려 퍼진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 [시민방송뉴스통신]
  • 입력 2013-02-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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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3-02-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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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 광장에서 울려 퍼진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⑧] 이탈리아/밀라노(Milano)

밀라노 시가지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고딕식 대성당 두오모(Duomo)가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오르는 듯 세워져 있는데 하늘을 찌르는 크고 작은 135개의 첨탑과 3400개나 되는 조각상들은 마치 하늘의 은총을 기원하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두오모 광장. 대성당 두오모는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을 마주보고 있다.

두오모 광장. 대성당 두오모는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을 마주보고 있다.


이 두오모 앞에 넓게 펼쳐진 광장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된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대성당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는 거의 1400년 동안 끊임없이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아 왔는데 나라가 갈기갈기 찢긴 이탈리아인들은 통일을 염원했고 드디어 1861년에 ‘이탈리아’라는 나라이름으로 제1차 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라는 고유명사가 정식으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이제 15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베르디이다. 그는 특히 오페라 ‘나부코’를 통해 통일의 중요성을 부추겼다.

1842년 스칼라 극장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 될 때, 공연 중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이 흘러나오자 관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외세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고 또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르디’라는 이름은 통일을 염원하는 민중의 구호가 되어 거리에는 W V.E.R.D.I! (비바 베르디!)라는 글씨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것은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 만세!>의 약자로, 이탈리아 통일의 염원을 담은 문구였던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에 ‘바 펜시에로(Va’ pensiero..)’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으레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그런데 베르디의 이 성공작은 처절한 인생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

밀라노의 세계적인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 극장.

밀라노의 세계적인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 극장.

이 위대한 음악가는 따지고 보면 ‘음악대학 출신’이 아닌, 거의 스스로의 힘으로 음악가가 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면 베르디의 삶은 한 마디로 그 자체가 한 편의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18세 때 그는 밀라노 음악원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그 이유는 나이가 입학제한 연령보다 많고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이 아닌 다른 지방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음악적으로는 작곡실력도 허술하다고 평가되었다.

고배를 마신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에서 한때 활동한 적이 있는 동향출신의 작곡가에게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으며 작곡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홀로 터득해 나갔다. 그런데 그에게 견디기 힘든 인간적인 고통이 닥쳐온다.

시골도시 붓세토에서 신혼살림을 살던 중 1838년에는 딸이 죽었고, 밀라노로 이주한 1839년에는 아들마저 죽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840년에는 아내마저도 뇌막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게다가 스칼라 극장의 흥행사 메렐리가 청탁하여 무대에 올린 작품들도 모조리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으니 베르디는 삶의 의욕을 잃고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당시 그를 붙잡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실패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끝까지 꿰뚫어 보고 있던 사람은 바로 흥행사 메렐리였다. 만약 그가 베르디에게 새로운 오페라 ‘나부코’의 대본을 건네주고 작곡을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리 쓰여 졌을 것이다.

베르디의 묘소.

베르디의 묘소.


거의 90세까지 살았던 베르디는 삶의 마지막까지 정열적으로 작곡을 했는데, 오페라 ‘오텔로’는 74세 때 완성했고 오페라 ‘팔스타프’를 작곡할 때는 이미 80대의 노인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삶을 지켜준 신에게 바치는 종교곡을 쓰고는 1901년 1월 21일 오후 자기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르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9백 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이 두오모 광장과 밀라노의 거리에 울려 퍼졌으며 광장과 거리에 운집한 수천 명의 시민들도 이 노래를 같이 따라 불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역경을 이겨낸 후 이탈리아 통일의 혼을 불태우게 하고 또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입학을 거부한 밀라노 음악원이 나중에 ‘베르디 음악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정태남(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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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2013.02.08 정태남 건축사

시민방송 기자 simintv@simi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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