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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결 : 1957년 충북 괴산 청천면 출생
《오늘의문학》(1996) 등단
시집 『씨알을 묻다』(2016, 디자인신원) 외
샘터시조 장원(2008)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시하늘》 운영위원
비 2
누군가 빗줄기를 알맞게 조여 놓고
현 고르는 소리에 나직이 젖어들면
감감히 시들은 생각 올연히 돋아난다
* 2008년도 샘터문학상 시조부문 장원 작
낙관
절절 끓는 이 가슴 누가 좀 눌러주오
선명히 남기 위해 묵묵히 견뎌내며
차디찬 설한을 딛고 벙글어진 홍매화
소금쟁이
물위를 유유히 산책하는 저것 좀 봐
수면에 찍고 가는 낙관 같은 궤적 좀 봐
가식과 욕심도 놓은 저 경쾌한 보법步法을
낙조
시공의 파도를 저어 너울너울 헤쳐 온 길
개밥바라기 눈 비비며 부스스 실눈 뜰 때
갈무리 숨을 고르자 무지개 내걸린다
물결
당신은 언제나 끔쩍 않는 바위지만
앙가슴 두드리어 마음 열 수 있다면
뼈와 살 하얀 포말로 바스러져도 좋으리
종
혼자 울고 싶을 때 낸들 왜 없겠니
한번 울고 나면 그 울림 깊이 남아
가만히 걸어만 둬도 아스라이 우나니
연필 연가
허접한 이 허위를 벗을 수만 있다면
연거푸 깎이고 닳아도 좋으니라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슴앓이 할지라도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몽당이 될지라도
침 발라 혼신 다해 심지 곧추세우고
끝내는 한 벌 목숨이 스러진다 하여도
화살나무
줄 지어 서있다 성곽 그 둘레 가에
어느 때 스러져 간 병정들의 넋이기에
이토록 화살나무로 환생을 하였던가
가지마다 깃털* 달고 화살인 양 잎을 달고
굳건한 부동자세 한시도 풀지 않고
먼 성 밖 가늠하면서 애오라지 경계 중
* 깃털: 전우箭羽라고 함. 화살이 날아갈 때 곧바로 가거나
곡선을 그리거나, 빠르고 느린 것을 좌우하는 기능을 하는 것.
마수걸이
한천의 낙목 아래 좌판 막 펼치기에
다가가 제주 감귤 마수걸이 해줬더니
아지매 환한 미소가 덤으로 얹어 진다
들고 온 귤 봉지를 거실에 풀었더니
담아온 그 웃음이 둥 둥 떠다니며
흰 바람 다독이면서 잠재우고 말더라
암향暗香을 찾아서 32
― 백제금동대향로
어인 사연이기에 깊이 잠든 미라처럼
진흙에 몸을 묻고 지나 온 천년 세월
다시금 몸을 털고서 깃을 치는 봉황이여
연꽃도 봉래산도 부시게 눈을 뜨고
용은 또 향을 물고 하늘로 솟구치니
가슴에 스미어 드는 아, 더운 숨결이여
생이야 다신 못 올 한바탕 꿈이라지만
영욕을 넘어선 영생의 칠백 년 사직
찬연히 아로새겨진 왕조의 금빛이여
암향暗香을 찾아서 84
― 선운사
초여름 유적답사 선운사를 찾아드니
동백꽃 적멸하고 신록은 완연한데
버찌만 부끄리면서 나를 반겨 주더라
물소리 새소리로 청정이 세심洗心하며
연둣빛 숲길 따라 도솔암에 다다르니
마애불 머리 위로는 도솔천이 흐르더라
돌아서 오는 길에 시비 앞에 다가서니
미당未堂의 숨소리에 마음 괜히 설레더니
시 홀로 따라와서는 붉은 술잔에 담기더라
갈대
된서리 흰 바람을 춤추듯 받아내며
곧고 단단하되 안으로는 비워지나
하늘에 비춰 보면서 비추며 살아왔다
기러기 날아가면 달빛이 대신 들고
수심도 구슬리면 풀 먹인 잎새 되는
쓸려온 모래톱 위에 별빛 내려앉았다
할퀸 생채기는 몸 비벼 아물리며
해맑은 강심으로 마음을 가셔내며
시시로 배는 아픔을 꽃으로 피웠다
가을, 교향곡 2
이슬
누군가 은구슬을 풀잎에 달고 있다
풀벌레 노랫소리 낭랑히 스며들고
미리내 흐르는 소리 몽글몽글 맺힌다
조롱박
익을 대로 익었으니 너를 뚝 따 내려서
표주박을 만들어 달빛 길어 마실거나
호리병 만들어내어 세월 담아 둘거나
붉다
실바람만 스쳐도 설레던 마음자락
부풀어 오르면서 가슴 앓던 석류가
가을볕 쏘는 눈빛에 알알이 쏟는 고백
솔대*
추적이는 가을비에 소슬히 젖은 마음
바람에도 안 되고 볕으로도 안 되어
온 산을 사르고 있는 단풍 불에 말린다
* 솔대 : 필자의 아호
식지 않는 그리움
호드기 입에 물고 삘릴리 불어대면
나들이 가던 뱀도 발길을 멈춰 듣고
구성진 가락에 젖어 패어나던 청보리
꼴 베어 고삐 잡고 삽작길 들어서자
말끔히 비질하고 좌우로 늘어서서
파랗게 손을 흔들며 반겨주던 댑싸리
구슬땀 흠씬 배인 타작마당 끝내시고
손 없는 날을 잡아 절구질하는 날은
새로 튼 용마루 위에 두리둥실 뜨던 달
찬바람에 문풍지 투레질 마구하고
앞산의 올빼미가 으스스 울어대면
철부지 파고들었던 어머니의 젖가슴
영상제작/제공 : 옥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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