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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무협지를 펼치면 결말이 궁금해 밤을 꼬박 새우곤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장풍이니 뭐니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무협지에서 배울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의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부모를 죽인 탐관오리를 각고의 노력 끝에 기필코 응징하고야 만다. 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누명을 쓰고 몇십 년을 감옥에서 썩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다. ‘의리’를 지키다 죽는 것을 대장부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 속이 무척 뜨거워지곤 했다. 백지상태인 어린 시절일수록 정의감에 불타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나도 이다음에 사랑을 한다면 그런 사랑 한 번쯤 해보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다가 스무 살 전후쯤, 어디서 자그마한 샘터 잡지를 구해다 읽었는데, 거기에 어느 시인의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제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가지 엮고 진흙 발라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 갈며 꿀벌도 치며
벌이 노래하는 숲 속에서 홀로 살련다….
우리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이니스프리의 호도’란 시인데, 이 시를 쓴 시인이 바로 예이츠다.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들고 힘든 시기를 겪어서 그런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는 이 시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숲 속에 들어가 벌이나 치며 혼자 살겠다고 했을까.
그런데 샘터를 읽어보니, 이 시는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한 향수뿐 아니라 그의 청춘을 다 바친 진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이 녹아든 시였다.
아일랜드는 영국 옆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로, 토지가 척박하고 국력이 약해 수백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찍부터 해외로 진출하여 본국 인구는 불과 400여 만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 내 아일랜드계 후손은 3,400만이나 된다고 한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윌슨, 케네디, 존슨, 닉슨,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 등 최소 15명 이상이 아일랜드계다.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조이스, 버나드 쇼, 러셀 등 쟁쟁한 문인을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영국에 대해서는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듯한 한서린 감정이 남아있다고 한다.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 불붙고 있던 시절, 20대 초반의 예이츠는 수잔이라는 독립운동하던 여자를 사랑했는데, 수잔은 예이츠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고 같이 독립운동하던 피터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녀의 눈에는 시 나부랭이나 끄적이는 예이츠가 너무 연약한 남자로 비쳐졌던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잔은 이승만 박사와 함께 독립운동하던 임영신 여사같은 여장부였던 모양이다. 이승만 박사도 독립운동하던 시절, 동료였던 임영신에게 구혼했는데, 당시 임영신은 “나를 여자로 보지 말고 같이 독립운동하는 동료로 봐주세요.”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 이승만은 50줄에 오스트리아에 갔다가 어느 식당에서 접대하던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구혼하였고, 동양의 중후한 노신사에게 끌린 프란체스카가 응하여 결혼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세월이 흘러, 수잔의 남자 피터가 영국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그때까지 미혼으로 남아있었던 예이츠는 ‘이제는 내 마음을 받아주겠지.’ 생각하면서 다시 수잔에게 구애하였으나, 수잔은 거절하고 아예 프랑스로 망명해 버렸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임영신을 초대 상공부 장관을 시켰고, 임영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이승만을 측근에서 도왔다고 하는데, 수잔은 아예 다른 나라로 도피를 해버려 만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문득 예이츠가 그 여자의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언 25년이란 세월이 흘러 50줄에 접어든 중년의 신사가 되어있었다. 그가 흘러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면서 탄식하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한 여자를 위해 몇십 년을 감옥에서 썩는 무협지 이야기가 연상되어 가슴이 아팠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예이츠는 뒤늦게 정계에 투신하여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즈음 29살 노처녀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 낳아 손잡고 찍은 흑백사진이 샘터잡지에 실렸던 기억이 난다.
예이츠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한 여인을 위해 25년을 허송세월한 한 시인의 순애보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 뜨거운 정열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 아니던가.
내 나이 장년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예이츠의 행동이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 원래 이렇게 현실적이 되어가는 건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그렇게 참고 삭히며 불행하게 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도 우리의 인생에서 그런 열렬한 사랑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에 주옥같은 시가 나왔고, 그런 인고의 세월을 겪었기에 문단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옥 창 열 제공 : 수필가, 시조 시인
제1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2015년)에 수록
퇴직자단체 잡지(2014.7/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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