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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내 고향에는 마을마다 두어 집씩 집 뒤편에 대숲이 있다.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사철 푸름을 간직한 모습이 늠름하고 청량하다. 바람을 맞으면 가지와 잎이 요동치면서 사각거리기도 하고 우수수 스산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름은 대나무지만, 실제로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단단한 목질부가 있느냐와 부름켜가 있어 부피 생장을 하느냐가 풀과 나무를 가르는 기준인데, 대나무는 후자를 충족하지 못한다. 바나나와 야자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저러고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는 대나무의 성격을 시조로 잘 표현했다.
대나무는 죽순이 돋아난 지 한두 달 만에 완전히 자란다. 수명은 150년가량이라고 한다. 하룻밤 사이 쑥쑥 올라오는 죽순은 생기가 넘치고 탐스럽다. 삶아서 초장에 찍으면 은은하고 담백한 향과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영관급 장교의 계급장은 다이아몬드 주변에 9개의 댓잎이 붙어있고, 국세청의 마스코트도 대나무다.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킨다고 할 때 ‘대쪽 같다’라고 한다.
시경詩經에는 사군자의 하나로 매화, 난초, 국화에 앞서 대나무가 나온다. 대나무를 군자로 지칭한 최초의 기록인데, 주나라의 제후국인 위衛 무공武公의 높은 인품을 대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해 칭송하고 있다.
대나무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60년 정도 주기로 피거나 극심한 가뭄이 들 때 핀다고 한다. 일단 꽃이 피면 대숲이 고사하는데, 개화로 인해 땅속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싹의 90%가 썩어버리기 때문이라 한다.
대나무는 중국 남부지방이 원산지라는데, 고향의 기후와 맞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남미 원산인 고구마가 한국으로 시집온 뒤 꽃을 잘 피우지 못하다가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꽃 피는 빈도가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청아한 외양과는 달리 대숲에는 징그러운 지네가 많이 산다. 시골에서는 이 지네를 잡아 말렸다가 신경통이나 관절염약으로 썼다. 지네의 독이 어혈을 풀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여 병을 치료한다고 믿는다.
지네를 잡는 방법은, 생선이나 동물의 뼈를 병에 담아 대숲에다 두면 된다. 물고기를 잡을 때 통발에다 된장을 담아 냇물에 넣어두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며칠 지나서 가보면 지네나 물고기가 잔뜩 들어 있다.
대나무는 쓰임새가 참으로 다양하다. 식기와 물병이 되었다가 땔감과 무기가 되기도 한다. 부채와 죽부인, 돗자리 같은 대나무 공예품만으로 박람회가 열린다. 대나무가 흔한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돌도끼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중국 극동지방의 모소대나무는 씨앗이 뿌려진 후 4년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미동도 없다가 5년이 되는 해부터 매일 한 자씩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6주가 되면 주변이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한다.
모소대나무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 이면에는 뿌리를 내리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몸집과 힘을 키운 후에 패자에 도전하는 수사자가 연상된다. 우리도 이런 인내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 제3 수필집 『워낭소리의 추억』(2021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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