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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박 꽃
수필 밝덩굴 / 낭송 옥창열
썩은 호박 거름되라며
꽃밭에 버렸더니
뿔난 씨앗 하나
온 지붕 덮었구나
호박꽃
벌떼 불러 모은 가무회
기왓장도 들썩이고.
서너 평 꽃밭 귀퉁이에 호박씨 하나, 둥지 틀고 노랗게 삐죽터니 세 가닥 줄기로 굵어지며 엉금엉금 지붕에 기어오른다. 하루가 다르고 열흘이 무상터니, 줄기는 엄지손가락 굵기로 그 뻗어감이 우리 집 담을 넘어 수원월드컵 지붕을 뒤덮을 기세다.
이렇게 뻗어 오른 백마고지 탈환 같은 호박 꽃 역사는 아무래도 줄기를 굳게 버티게 한 오방(五方)에 뿌리박은 넝쿨손인데, 마치 오선지에 높은음자리표를 떡 걸친 듯한 악보(樂譜)다. 지붕에 올라서서 호박 숲으로 앉은 세미원 같은 연꽃연못이다.
개미는 늘금늘금 오르내리고, 벌들은 웽웽 날고, 청개구리 한 마리 숨을 할떡일 때, 꽃봉오리는 꽃을 피우려고 봉긋봉긋하면 여기서도 저기서도 노랑 불꽃이 나발을 불어댄다. 이때 벌들은 발로 바쁘고, 나는 손으로 급하다. 이 월모(月姥)의 노릇이 술 석 잔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꽃이 피었다. 호박꽃이 피었다. 노오란 다섯 잎의 수줍은 촌색시가 웃는다. 해가 뜨면 너무 좋아서 활짝 웃다가 햇볕이 강하게 내려 쪼이면 꽃잎을 닫는다. 일편단심 해바리기의 순종이다. 이 짧은 순간, 가장 노랗게 웃고, 재빨리 꽃 오므리는 순애보가 더 사랑스럽다.
호박꽃은 넉넉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팔꽃 마냥 더덕더덕이지도 않고, 연꽃 마냥 십 리 멀뚱도 아니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고 싶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냥 마음씨 좋은 아즈매, 그저 배려하는 아저씨가 웃는 허허호호 꽃이다. ‘호박꽃도 꽃이냐?’ 이 말은 꽃이 이쁘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이쁘다고 하면 한없이 이뻐지는 것이고, 밉다하면 끝까지 밉다. 이뻐라 하고 생각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이쁨이 보인다.
이런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호박꽃, 우리 생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식구처럼 산 꽃이고, 동의보감에 가장 많이 오른 필요불가결의 꽃이다.
호박꽃은 이쁘다. 호박꽃은 저절로 피고 스스로 이쁘다. 호박꽃은 은근한 호감을 뿌리면서 동무를 불러 모은다. 개미, 나비, 벌, 나중에 호박을 따기 위해 칼을 든 주인까지 부른다. 잔잔한 푸른 바다에 노랑 트럼펫 불면서 가면무도회를 연다.
호박꽃은 가족을 거느리며 사랑한다. 밧줄 같은 튼튼한 줄기, 넓고 푸른 잎, 그리고 가족을 버티게 하는 막내 넝쿨손을 믿고 꽃을 피운다. 그리고 가족이 태풍이 몰아칠 때, 넝쿨채 구르면서까지 책임을 스스로 진다. 부끄럽다며 꽃잎을 슬그머니 접으면서.
황금꽃, 호박꽃이 얼마나 이뻤으면 ‘황금꽃’이라 했을까? 하늘에서 금을 모아 황금종을 만들다 잘 안되어 인간 세상에 와 보니, 벌써 저 곳에 이쁜 꽃이 있었다. 황금 빛 꽃이었다. 이것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나서 황금종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금꽃은 황금알을 낳는다. 저보다 오십 배나 되는 황금동자를 키우면서 세상을 잊는다. ‘호박꽃도 꽃이냐.’도 잊고, 오직 이쁘다고 칭찬한 사람들을 향해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한다.-기쁨과 넉넉한 웃음, 식탁에 오를 건강먹거리, 약리 효과의 치료제까지.
밝덩굴 약력
경기중등 교장/법무연수원, 대학 강사 역임
한글이름펴기 으뜸빛 회장 역임/한글학회 회원
한국문협 경기지부장/경기수필 회장 등 역임
수필집 5/시조집 1/희곡집 2/학술서 3권 저술
녹조근정 훈장/경기도예술대상/한국문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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