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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사랑! 참으로 가슴 뜨겁고 가슴 벅찬 말이다. 사랑으로 인해 때로는 희열과 환희에 들뜨고, 좌절과 실의에 괴로워한다. 뜨거운 정열의 원천이자 차가운 고통의 근원이며, 펄펄 끓어 넘치는 에너지원이자 가슴을 쥐어뜯는 절망의 나락이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만물이 소생하고 엄마의 돌봄으로 아기가 자라나는가 하면, 소유욕으로 질투하고 모함하거나 본능을 못 이겨 이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유용하면서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불이요, 없어서는 안 되지만 보이지 않아 소중한 줄 모르는 공기와 같다.
이것이 없었으면 책과 영화도 없었고, 종교와 철학도 없었다. 이것이 없었으면 우리 인간은 물론 지구 상의 어떤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멀쩡한 병사가 탈영하고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데 위중한 군인의 임무를 망각하게 하고, 소중한 생명까지 버리게 만드는가? 우리는 왜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 사랑 없이 우리는 살 수가 없는가? 사랑을 해야 한다면 어떤 사랑을 해야 옳은가?
우리 존재의 뿌리이자 젊음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이란 말은 ‘살’이란 어근에서 파생된 말이다. ‘살’은 말 그대로 산다(live) 또는 삶(life)이란 뜻으로 여기에 명사형 어미 암이 붙으면 사람(human)이 되고, 다시 사람이 먹고 사는 쌀(rice)이 되며, 그 쌀을 먹고 살(flesh)을 얻어 삶을 영위하면서 사랑(love)을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좁게는 남녀 또는 암수 사이에 종족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서로 끌리도록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장치이다. 넓게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 병자나 약자에 대한 동정처럼 차원이 높은 이타적 사랑도 있다. 동식물이 후세를 퍼뜨리며 세대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도, 삼라만상이 서로 의지하며 존재하는 자체도 사랑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인간과 만물을 존재케 한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감정이기에 모든 종교에서도 사랑을 가장 핵심적인 어젠다로 설정하고 강조한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 힌두교의 카마(kama)가 그것이다. 사랑은 미움과 대비되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과 함께 ‘미운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을 여덟 가지 고(苦)에다 넣고, 모두 끊어내야 할 번뇌로 간주한다. 사랑이란 미묘한 감정의 문제로, 잘못 다루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고, 시앗 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예로부터, 문인과 사상가들이 가장 흔하게 다루었던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소금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 때문이다. 조물주의 빛이 만물을 번성케 하고, 농부의 써레질이 농작물을 자라게 하며, 부부의 정이 자손을 양육하는 건 사랑의 선한 얼굴이다. 뜨거운 빛이 가뭄을 유발하고, 성난 산불이 수풀을 태우며, 동물적인 육욕이 강간과 미성년자 간음 같은 성범죄를 초래하는 것은 사랑의 악한 얼굴이다. 증오에 가까운 편집광적 사랑, 스토킹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된 사랑도 이미 참다운 사랑이 아니다. 마땅히 경계해야 하고, 적절한 조절과 통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종교나 문화권에서는 사랑을 너무 정신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성을 죄악시하여 불필요한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성욕이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인위적으로 억제하기가 어렵고 종종 이성을 넘어선다. 우리나라는 겉으로는 근엄한 도덕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음성적으로 온갖 매춘과 음란, 퇴폐문화가 판을 치는 이중적이고 모순된 사회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법으로 규제해도 이발소, 노래방, 안마방, 전화방, 술집 등의 퇴폐행위는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다.
뉴욕으로 일 년짜리 어학연수를 같이 갔던 동료가 연수 기간의 절반을 보낸 어느 날, 맨해튼 거리를 같이 걸으며 하는 말이 “미국 오면 길 가다가도 여자를 막 줍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라며 신세 한탄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미국이 포르노는 합법화되어 있지만, 흔하디흔한 커피숍이나 술집이 잘 안 보이고, 술도 딱 정해진 가게에서 성년인지를 확인한 후에나 판다. 해가 떨어지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 바쁜 모습이 뜻밖에 가정적이다. 거기에 비해 한국 남자들의 밤 문화는 유명하다. 우리가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서양에서 온 여자들도 한국 남자들의 밤 문화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 허리 아래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법으로 규제하려 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부자연스럽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제도는 안 된다. 국가 공권력은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보장된다. 무슬림 국가를 빼고는 한국과 이스라엘 정도에만 남아있던 간통죄는 2015년 초에 폐지되었고, 성매매를 규제하는 법도 현재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이 제기되어 있다. 한때 집창촌 박멸에 앞장섰던 김강자 전 서울 종암경찰서장이 위헌 쪽 증인으로 적극 참여 중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이분도 퇴임 후, 마구잡이식 단속이 능사가 아니란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성매매는 필요악으로, 단속하면 더욱 음성적인 데로 흘러가 국민 건강을 위협한다. 성매매가 불법인 나라는 OECD 30개 선진국 중에서 한국을 포함하여 5개국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랑의 육체적 측면인 성(性)을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상은 바뀌고 성 풍조도 바뀌어가고 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독신주의자가 많아지면서 프리섹스 경향은 더 짙어질 것이고, 수명이 연장되면서 결혼을 두세 번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경제적인 풍요는 필연적으로 성을 쾌락으로 즐기려는 풍조를 가속하고, 계약동거나 계약결혼을 비롯한 부부생활의 다양한 형태가 실험될 것이다.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들도 음지에서 떳떳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진보적인 종교인 라엘리안에서는 인생의 목적이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를 모두 인정할 뿐만 아니라 가급적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면서 인생을 즐기라고 가르친다. 소설 『즐거운 사라』로 홍역을 치른 고(故) 마광수 교수도 같은 주장이다. 결혼하여 부부가 같이 살면 편하고 유리한 점도 많으므로 이들의 주장이 꼭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일면의 진리는 있다고 보인다. 특히, 아이들 다 길러놓고 갱년기에 접어드는 나이가 되면 대개의 부부가 섹스리스 상태가 되어 무미건조하게 산다. 그럴 바에야 가정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부부가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미 20세기 초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문학적, 철학적 동지로 계약결혼을 통해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각자 자유연애를 하다가 죽어서는 나란히 무덤에 묻힌 사례가 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 드라마 중에는 불륜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래야 극 전개가 재미있고 시청률이 올라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교적 인습이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남녀가 많아진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다. 가정문제를 오래 상담해온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는 순결 이데올로기 때문에 불륜을 저질러도 당당하지 못한 여성이 많았지만, 지금은 “내가 좋아서 만나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떳떳이 말하는 사례를 많이 접한다고 한다. 가족 개념이 희박해지면서 외도를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 최근에는 여성 외도가 증가해 비율로 따지면 남녀 외도 비율이 7 대 3 정도라고 한다. 다만,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되더라도 배우자를 다시 잡으려는 마음이 커서, 실제로 이혼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아무리 화려한 포장지로 싸고 또 싸도 사랑이란 어차피 성호르몬과 대뇌의 환상이 밀당을 벌여 만들어낸 조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모든 열정은 겉으로는 숭고해 보여도 그 뿌리는 성적 본능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고작 2~3년으로, 이 기한이 지나갈 때쯤 권태란 망토를 걸친 이별이 찾아온다. 특히, 불륜의 경우는 신비감이 사라지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감이 밀려오며, 가정에 대한 의무감이 살아나 헤어지는 수가 많다고 한다. 어떠한 경우든, 사랑을 유지하고 싶으면 유통기한이 다하기 전에 단단한 정성의 끈으로 서로를 옭아매고, 끊임없이 신비감을 발산하여 권태의 망토를 걷어내는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세상을 가장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반면에 가장 추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밝고 아름답게 표출될 수 있게 힘써야 한다.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로를 인위적으로 억누르지 말고 최대한 출구를 찾아주는 노력과 결혼생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행복을 찾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다만, 쾌락만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으므로 욕망에 꺼둘리지 않는 마음의 수행 또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제2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 2』(2019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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