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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현직 때는 일이 바빠, 은퇴 후에는 놀기에 바빠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부모님을 뵈었다. 이제 팔순 장모님 한 분 남았는데, 2년 전에 뼈를 다쳐서 처남이 운영하는 요양병원에 모셨다. 때마침 설치는 코로나로 면회를 못 하다가 이번에 퇴원하셨다고 하여 뵈러 가는 길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얼굴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대구에 도착하여 장모님을 뵈니, 주름지고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신다. 그러다 금세 눈시울이 촉촉해지시는데, ‘다시 못 보고 죽는가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부모는 자나 깨나 자식 생각인데, 자식은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올라오는 길에, 삼국유사를 쓴 일연선사가 구순 노모를 모셨다는 인각사가 생각나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구 동쪽 팔공산 너머 군위군에 이 절이 있다.
일연은 원효의 고향인 경산 출신으로, 나이 불과 아홉에 절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여, 스물둘에 승과에 장원하고 국사國師에 오른 고승이다. 영덕의 이색, 영천의 정몽주, 구미의 길재와 함께 일연도 이 지역이 배출한 고려의 걸출한 인재였다.
군위에 들어서니, 식당에도 장터에도 ‘삼국유사의 고장’이란 팻말이 요란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 안내판에도 어김없이 이 팻말이 붙었다. 택시기사분 말로는 인각사가 있는 고로면을 작년에 아예 삼국유사면으로 바꿨단다.
인각사는 산중이 아니라 위천渭川 강가 대로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흔한 일주문, 금강문도 하나 없고 전각 몇 채가 드문드문 무질서하게 늘어서서, 무심코 내달리다간 지나치기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 고은이 쓴 일연찬가 시비가 있었고, 그 옆에 발굴조사 때 나온 주춧돌과 석등 조각 같은 석재들을 한군데다 모아놓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유서깊은 대가람이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한다. 터는 꽤 넓은데 제대로 된 건물이 적어 휑뎅그렁한 느낌이다.
한쪽에서는 어수선한 중창 불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군비郡費가 부족한 지 10년 넘게 계속 그러고 있단다. 군위군 인구가 쪼그라들어 서울의 한 동 규모인 2만여 명이라고 하니 재정이 빠듯할 법도 하다.
대웅전에 해당하는 극락전은 세월의 무게가 겨운지 네 귀퉁이에 붉은 기둥을 지팡이처럼 짚고 섰고, 그 앞의 고려시대 삼층석탑은 이빨 빠진 노인이 되어 힘없이 앉아있다. 극락전 뒤편, 자그마한 미륵당에 안치된 통일신라 석불좌상은 두 팔과 무릎이 죄다 잘려 나가 안쓰럽고 처연하다.
절 건너편에는 둘러친 학소대 바위 절벽이 제법 운치가 있고, 선사가 주석할 때는 총림법회가 열리던 대가람이었다는데,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하기야 제행諸行이 무상한데 가람인들 성할 리 있겠는가. 흥하고 쇠하는 게 세상의 이치거늘, 이곳을 둘러보니 더 크게 와닿는다.
국사전에는 선사의 존영과 출가부터 승과 급제, 여러 승직을 거쳐 보각국사로 임명되기까지 연표가 걸려있고, 전각 옆으로 부도와 다 부서졌을망정 송덕비가 남아있어 선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선사는 일흔여덟에 국사가 되었는데, 개경에 1년 머물다가 병든 구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이 절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소년 출가하여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지만, 병든 노모에게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낙향한 지 1년 만에 노모를 잃었고, 여든넷에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이 절에서 필생의 작업인 삼국유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전국의 유물 유적을 두루 답사하면서 사서를 구상하였던 듯하다. 최고위 승직자 자리도 참고 문헌을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외세 침략에 맞서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정사인 삼국사기에 빠진 단군신화를 채록했고, 향가와 귀중한 설화를 남김없이 모아 후세에 전했다. 매임이나 걸림이 없이 자유롭고 진솔한 야사로, 정해진 틀에 얽매인 정사를 제대로 보완하고 있다는 평이다.
삼국유사 판본은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이 찬란한 보물을 완성하는데 효성이 한몫했다. 늙고 병든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사직하고 낙향할 명분도 없었을 테고, 삼국유사의 탄생도 어려웠을 것이다.
절집 툇마루에 앉아 가슴으로 둘러보니, 저만치 걸어가는 선사의 장삼 뒤로 천년을 이어온 집념이 살아서 펄떡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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