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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창 열
뉴질랜드는 그림엽서처럼 푸른 목장과 흰 양 떼가 인상적인 나라이다. 여행 중에 양털 제품을 파는 가게에 들르면, 폭신한 양털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 때 알몸으로 자는 게 건강에 좋다는 이색적인 설명을 듣는다. 낮의 피로를 내려놓기 위해 밤만은 모든 허울을 벗고 알몸으로 누워야 혈액순환이 잘 된다는 거다.
밤에 자기 집에서 홀랑 벗고 자든 말든 그거야 누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공공장소에서 공공연히 알몸으로 시위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왜 이런 민망한 일을 벌이는가?
세월호 참사 직후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한겨레신문에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자 보수층 독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나체로 엎드린 네 딸 교육에나 신경 쓰라!”고 질타한 적이 있다. 도올의 딸이 미국과 터키 등지에서 돼지와 함께 누드 사진을 찍었던 일을 두고 비난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방도 아닌 돼지우리 안에 들어가서?
누드 촬영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외설이 될 수도 있다. 그 경계가 모호해서 자주 논란이 되곤 한다. 누드를 보고 정신적 반응이 먼저 오면 예술, 육체적 반응이 먼저 오면 외설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창의적이고 철학이 바탕에 깔렸다면 예술 행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대 종교 유물에는 나체, 특히 남성의 나체를 찬양한 것들이 많다. 신을 형상화한 것이 인간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은 당연히 알몸이라고 보는 관점의 소산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서부터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누드 조각상이 제작되었고, 특히 그리스에서는 알몸으로 고대 올림픽이 열렸다.
철학적으로 알몸을 중시하는 이들도 인류 역사상 늘 존재해 왔다. 이른바 자연주의자들로, 인간의 모태인 자연과 가장 가까워지기 위해선 당연히 알몸으로 생활하자는 주의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근본적인 것이 우리의 몸인데 이를 부끄러워하고 감춰서는 안 된다는 믿음도 더해진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호소하는 수단으로 알몸을 이용한다. 이른바 알몸시위인데, 도발적인 행동으로 현재 상황에 도전하고, 두려울 것도 숨길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알몸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벌어진 알몸시위 사례는 환경단체의 지구 온난화 경고, 동물 애호단체의 모피 옷 불매운동, 동성애 단체의 소수자 성적 자유권 확보 등을 위한 것이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기 위해 2008년 1월 스위스 알프스의 빙하에서 600명, 2009년 10월 프랑스 부르고뉴의 포도밭에서 700명을 모아 집단누드 시위를 기획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러시아 내 표현의 자유를 촉구하기 위해 2013년 7월 네덜란드 리흐턴보르더에서 400명 집단누드 시위를 개최했다. 영국 워릭셔 주에 있는 워릭 대학교 여자 조정팀은 2009년부터 매년 자선기금 조성을 위해 누드 달력을 찍고 있다.
스페인의 동물 애호단체 ‘아니마내츄럴리스’는 2014년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광장에서 모피 반대시위를 벌였는데, 벌거벗은 회원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엉겨 붙어 도살당한 동물을 연상케 했다. 최근 EBS-TV에서 중국 내 모피산업 실태를 방영했는데,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살아있는 너구리의 털가죽을 홀랑 옷 벗기듯 벗겨내렸다. 거위와 토끼의 털을 한 움큼씩 잡아뽑을 때마다 진저리치며 질러대든 날카로운 비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누드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미국 사진작가 스펜서 튜닉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집단누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에머슨 대학을 나온 후 1992년부터 집단누드 사진을 찍어왔는데,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1만8천 명을 동원하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튜닉의 사진은 외설로 취급받았던 집단누드 장르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대표작은 2006년 8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1,500명, 2008년 2월 멕시코 수도의 소칼로 광장에서 18,000명, 2010년 3월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5,200명을 모아 집단누드 퍼포먼스를 펼쳤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한 여성 미술가가 박물관의 작품 전시장 앞에서 나체로 다리를 벌려 음부를 드러낸 채 앉아있었다. 직원이 제지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고, 관람객들은 웅성거리며 용기를 칭찬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튜닉의 집단누드와 네덜란드 미술가의 행위는 몸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행위예술(퍼포먼스)이자 급진적 혁명적 예술사조를 뜻하는 전위예술(아방가르드)에 속한다. 특히, 전위예술이란 반전통적 개혁적인 성향을 띠며, 양식상의 어떠한 속박도 거부한다.
사진작가는 행위예술이나 전위예술을 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라 치고,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사진 한 장을 받는 조건으로 촬영에 응했다는 그 많은 자원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털이 숭숭한 음부를 그대로 드러낸 알몸의 남녀가 한 데 뒤섞여서 말이다. 아마 집단누드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체험의 충격, 즉 작가의 창작 의도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닐까?
체면치레와 숨기는 걸 좋아하고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젖은 우리가 보기에는 충격이다. 서양 기독교 문명도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 못지않게 보수적이었던 걸로 아는데, 어쩌다가 사람들이 떼로 옷을 벗게 되었는가?
문화나 관습, 정치이념에 따라 생각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사례는 많이 있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구미나 일본인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을 미개인이라고 비난한다. 모피코트는 여성들이 아주 좋아하지만, 미국에 가면 동물애호전선이란 테러단체가 모피코트 입은 사람에게 페인트를 뿌리거나 위해를 가한다. 구미에서는 포르노가 합법이지만, 거리에서 포르노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여성단체도 있다.
누드시위나 누드촬영 문제 역시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도,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잠시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정치이념이 달라도 우리는 어울려 살아가야 할 같은 인류가 아닌가.
* 계간 수원예술 2018년 겨울호 기고
* 제2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 2』(2019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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