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수 156 회
옥창열
무릇 모든 세상일에는 명암이 있다. 중국이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일구어 아시아 주변민족에 영향을 끼쳐온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들이 멸시하던 오랑캐도 하지 않던 부끄러운 식인풍습을 가졌던 것 또한 사실이다.
소설 삼국지 원전을 보면 유비가 전쟁에 패하여 도주하던 중 어느 민가에 들러 하룻밤 유숙하는데, 아침에 고깃국이 나왔다. 맛있게 먹었는데, 엊저녁에 보이던 안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헛간에 갔더니 안주인의 시체가 있어 바깥주인에게 물어보니, 대접할 게 없어 마누라를 잡아 국을 끓인 것이라 답했다. 요즘의 윤리관으로 보면, 유비가 당연히 호통을 쳤어야 마땅하다.
“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마누라를 죽여서 국을 끓일 수 있나?”라고….
그런데 삼국지 원전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충성심이 갸륵하다며 칭찬하고 만다. 당시 중국사회에 식인풍습이 만연해 있었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가족 간의 윤리보다 위에 놓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의 식인풍습은 그 역사가 깊고 오래되어, 푸줏간에 가면 앞에서는 돼지나 양고기를 걸어놓고 뒤에서는 암암리에 사람고기를 걸어놓고 ‘상육’(想肉=생각하는 고기)이라 부르며 싼값으로 팔았다 한다. 물론 법으로는 금지했지만 오랜 세월 지속하다가 송나라 말기에 와서야 거의 근절이 되었으며, 명나라 말기까지도 암암리에 사람고기를 팔았다는 설이 있다.
송나라가 시대배경인 소설 수호지에는 사람을 살해하여 장사하는 술집이 적어도 세 번은 등장한다. 반금련을 죽인 무송이 주방의 도마 위에 오를 뻔했고, 양산박의 대두목이 된 송강도 만두 속과 등잔용 기름이 될 뻔했다. 소설에 담긴 이야기이므로 지어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와 문화가 완성기에 접어든 당나라 시대에 실제로 장안거리에 ‘인육시장’이 있었고,
남송의 수도 임안에는 ‘인육요리점’이 있었다고 한다.
양산박의 호걸 중에는 이귀, 등비 등 인육을 먹는 인물도 많았는데, 양산박이 도적의 소굴이고 선량한 백성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인육을 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도적이나 양민의 구별이 없었고, 황제나 고관 등 신분의 귀천도 따로 없었다고 전한다.
인류사에서 식인풍습은 단백질 섭취가 어려운 지역에서 많았다고 하는데, 중국 한족들이 주변민족보다 식인의 유혹을 받는 상황이 더 많았던 것인지는 통계가 없어 알 수 없다. 어쨋거나, 황제들은 더는 식인풍습을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인육을 먹지 말라는 금지령을 여러 차례 내렸지만, 이 악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큐정전을 쓴 중국문인 루쉰(魯迅)도 중국의 식인 악습을 한탄하는 글을 썼다. 식인 악습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인륜 도덕을 강조하게 되었고, 일찍부터 유교가 발달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폈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이인화의 『초원의 향기』에 보면, 소설이긴 하지만, 중국의 식인풍습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나와 있다. 시대적 배경은 고구려 멸망 직후의 당나라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포로나 중죄인이 처형되면 그 고기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고, 사람들이 서로 가져다 먹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바로 저 항아리에 고여락의 시체가 담겨있는 것이다. 아니, 시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여락은 해형(醢刑)을 당한 것이다. 땅에 말뚝을 박아 사지를 묶어놓은 상태에서 날카로운 칼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하나하나 찢어발겨진 것이다. 그 발겨진 살점들이 지금 소금과 양념에 절여져, 먹기 좋은 육장이 되어 항아리에 담겨있는 것이다.
문간은 싸늘한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해형은 은나라 때부터 계속된 유서깊은 형벌이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로도 그 살점이 토막 내져 해가 되지 않았던가. 인육을 먹는 관습이 없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충격적인 형벌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오랑캐 민족을 다스릴 때 살점을 찢어발기는 해형(醢刑)과 아예 통째로 살가죽을 벗겨 말리는 포형(脯刑)을 빈번히 행했다. 사람고기로 만든 육장은 장안성 안의 감옥으로 가져가 죄수들에게 먹였다.
언젠가 아육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오랑캐라는 소리를 들으면 구역질을 느낀다네. 도대체 누가 이적(夷狄)이고 누가 야만이란 말인가. 나는 동서로 흘러다니며 온갖 종족들을 다 만났네. 그러나 아직 중국인들만큼 불결하고 추잡하며 도의가 없는 족속들을 본 적이 없네. 조금만 흉년이 들면 사람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장의 푸줏간에서는 몰래 사람고기를 한 근에 500전씩 팔지 않는가. 모든 약방에서 사람의 간과 쓸개를 팔고 있네. 언젠가 하북의 한 객잔에서 고기만두를 먹다가 썰다 만 사람의 손가락을 뱉은 적도 있다네.”
원나라 말기 도종의가 저술한 『철경록』(輟耕錄)에는 인육의 맛과 요리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양산박의 영웅호걸들이 활약했던 북송 말기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당시 회하 상류 지방에서 전전했던 병사들은 인육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나 요리하는 방법은 더욱 처참하다. 우선, 잡아먹으려는 사람의 손발을 묶고 끓는 물을 끼얹은 다음에 대나무 빗자루로 피부를 벗겨 낸다. 그런 후, 산채로 자루에 넣고 거대한 가마솥 안에 넣어 삶아서 충분히 익으면 자루째 꺼내어 먹는다고 되어있다.
그럼, 식인은 중국에만 있었던 풍습인가? 서양의 경우는 중국처럼 일반적인 것은 아니고, 종교적 이유나 전쟁 시기 굶주림 때문에 또는 범죄자들에 의한 우발적 식인사례가 보이고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BC 5세기 그리스 역사가)가 쓴 『히스토리아이』(역사)에 보면,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와 아프가니스탄 서부 사이에 맛쵸키타이족이 살았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침략을 세 번이나 막아낸 유목민족으로, 헤로도토스의 여행 당시 여왕이 다스렸으며, 결혼과 정절에 대한 뚜렷한 관념이 없어 누구라도 남녀가 눈이 맞으면 텐트밖에 막대기를 꽂아두고 안에서 섹스를 즐기는 자유로운 성 풍속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자손들이 그 부모의 고기를 먹어야 영혼이 영생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1억 원을 줄 테니 돌아가신 부모의 고기를 먹지 말라.”고 제의하면 그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고 한다. 반면, 인육을 먹는 관습이 없는 그리스인에게 “1억 원을 줄 테니 돌아가신 부모의 고기를 먹어보라.”고 제의하면 “무슨 야만인 같은 말인가? 절대 안 된다.”며 거절한다고 한다.
이처럼 관습에 따라 행동양식이 너무도 차이가 나므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노모스(관습)야말로 만물의 왕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전쟁터에서 식량이 부족할 때 아군끼리 서로 잡아먹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사군토움을 포위했을 때
그곳 주민이 인육을 먹었고,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누만티아 시를 탈취했을 때 절반쯤 먹어치운 아이의 사체를 가슴에 감추고 있는 여자가 발견되었다.
로마의 시저 집권기에 유명한 폭력단 ‘카타리나’의 구성원들은 남자 한 명을 살해하여 인육을 먹으면서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15세기 영국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로 나뉘어 있을 무렵, 한쪽에서 중죄를 지으면 살짝 국경을 넘어 도피하는 일이 잦았는데, 잉글랜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처녀 하나를 데리고 스코틀랜드 국경지대로 넘어간 흉악한 사내가 있었다. 은폐가 쉬운 굴에서 기거하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을 강탈한 돈을 가지고 마을에 내려가 식료품을 사다 먹다가 나중에는 돈을 빼앗은 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람을 죽여서 고기로 먹어치웠다.
그들 사이에 자식이 생기고 그들끼리 근친교배로 손자, 증손자까지 생겨 어느새 50명에 이르는 대식구가 되자 점차 대담해져 대규모 상단을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경지역에서 수십 년간 실종사건이 잇따르자 당시 헨리 국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수색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은거지인 굴이 발견되었다.
굴 안에는 수많은 인골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사람을 죽여 가져오면 여자들이 요리하여 돼지고기처럼 걸어놓은 무시무시한 광경이 목격되었고, 마침내 머리가 허옇게 센 원흉인 사내부터 여자, 갓난아이까지 모조리 붙잡혀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한다.
그 외, 마젤란 여행기에 보면 남태평양의 식인종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실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 이런 식인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민족(한족)은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혈인데,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6대 4 정도로 남방계 비중이 높다. 아무래도 동남아 쪽의 식인문화가 중국으로 올라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에 광우병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식인풍습이 광우병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의 사료가 부족한 유럽에서 소에게 소뼈 육골분을 먹이다가 광우병이 많이 발병하여 조사해본 결과, 동종의 고기나 뼈를 자주 먹게 되면 프라이온이란 변형 단백질이 생기고, 이것이 광우병으로 발전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남태평양의 어느 부족도 식인습관 때문에 뇌가 숭숭 뚫리는 광우병에 걸려 거의 멸족상태에 있다는 TV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은 참으로 똑똑하시다. 그 옛날 어떻게 그걸 알고 식인풍습을 멀리했을까. 거기다가 똑똑한 아이 낳으라고 족외혼까지….
* 공자도 (사람고기로 담근 육장인) 해(醢)를 즐겨먹다가 제자 자로가 위나라 영공의 미움을 받아 해가 되어 돌아온 뒤부터 해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예기, 동주열국지, 장자), 이 해가 반드시 사람고기로 담근 육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있어 본문에 넣지 않았습니다.
* 첫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2015년)에 수록
다음 동영상
총의견 수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이용가능합니다.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