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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우리 동네는 가로수가 벚나무다. 아파트 안팎에도 꽤 오래된 벚나무들이 많아서 봄에 꽃이 활짝 필 때면 장관을 이룬다. 벚꽃놀이하러 서울 남산이나 여의도까지 갈 필요가 없다.
조달청 마산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스무 살쯤, 인근 진해로 출장을 갔다. 마침 군항제가 열리는 시기였는데, 도시 전체가 벚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벚꽃 천국이었다.
원래 일제가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면서 심은 것을 광복 후 거의 잘라버렸는데, 1962년 식물학자들에 의해 벚나무 원산지가 우리 제주도로 밝혀지면서 도로 심기 시작하여 벚꽃 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실제로, 봄이 되면 산벚나무꽃이 우리 산야를 하얗게 물들인다. 예전부터 각궁을 만들 때 벚나무 껍질을 썼고, 고려 팔만대장경 판의 반 이상이 벚나무 재질이라는 것만 봐도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식물임이 확실하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도 수십 년 된 벚나무 고목 수십 그루가 학교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봄 소풍을 갈 무렵이면 일제히 새하얀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밤에도 꽃등을 켠 것처럼 환할 지경이었다.
워싱턴D.C.에 가면 벚나무 가로수 길이 있는데, 나무들이 오래되어 봄철에 벚꽃이 만개할 때면 무심한 관광객들도 발걸음을 멈춘다. 일본 정부가 우호의 표시로 기증한 나무들이라는데, 화려한 꽃이 압권이다.
벚꽃이 일본의 국화란 소문이 있었으나 일본은 법으로 국화를 정한 적은 없고, 다만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라고 한다.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떨어지는 벚꽃이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국민성에 들어맞았던 모양이다.
벚꽃은 일본어로 사쿠라인데, 술을 뜻하는 사케가 우리말 ‘삭혀’에서 온 것처럼 벚꽃은 ‘싸그리’라는 우리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꺼번에 싸그리 피었다가 싸그리 진다는 뜻인데, 우스개가 아니고 전문가의 말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앞다투어 피고 나면 봄은 벚꽃에 이르러 절정을 맞고, 그 화사한 색감에 산야는 온통 홍역을 앓는다. 순결과 절세미인을 뜻한다는 꽃말답게 희고 청초한 그 모습은 차라리 한 떨기 슬픔이다.
그런데 벚꽃에 취해 봄을 상찬하기가 무섭게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정말로 열흘이 못 되어 말끔히 떨어져 길바닥을 하얗게 수놓는다. 짧고 화려하기에 더욱 아리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천 년 전 넘치는 금은보화와 1천 명의 비빈을 거느리며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한 말이다. 부귀영화가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벚꽃과도 같다는 뜻이다.
* 제3 수필집 『워낭소리의 추억』(2021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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