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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삼
1921년, 경주시 노서동의 한 무덤에서 찬란한 금관이 발굴되었다. 신라 금관이 처음 출토되었기로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으로 명명되었다.
또 무덤에서는 명문 ‘이사지왕도’가 새겨진 보검도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사지왕이라니?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없는 이사지왕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정체를 쉬이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단양신라적성비의 비문에서 금관총의 묘주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흥왕 12년(551년) 9월, 왕이 교지를 내려 아홉 명의 공신을 포상하였다.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 공취에 앞장선 공신 아홉 명을 포상하였다.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 영토를 협공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고도 한성과 6군을 되찾고,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을 차지하였다. 아울러 단양신라적성비에 공신의 관등 성명과 신분을 새겨 찬양하였다. 단양신라적성비를 세운 죽령은 지금의 소백산 죽령이요, 고현은 지금의 치악산 치악재였다. 단양신라적성비에 등장하는 인물 다음과 같다.
대중등 탁부의 이사부지는 이간이다. 사탁부의 두미지는 파진간이다. 탁부의 서질부지는 대아간이다. 탁부의 거칠부지와 내례부지는 대아간이다. 고두림성 군주 탁부의 비차부지는 아간이다. 사탁부의 무력지는 아간이다. 추문촌 당주 사탁부의 도설지는 급간이다. 물사벌성 당주 탁부의 조흑부지 급간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탁부와 사탁부는 왕족이다. 모두 줄탁동시 난생설화의 왕손임을 가리킨다. 그들은 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막새기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신라왕족 탁부와 가야왕족 사탁부의 출신 성분은 다르다. 비문에 등장하는 벼슬아치들의 이름에 ‘부지’와 ‘지’를 붙여 출신 성분을 구분하였다. ‘부지’와 ‘지’에 마한 군장의 존칭이었던 ‘신지’의 표기가 엿보인다.
탁부는 계림 김알지 탄생설화의 신라 왕족이다. 이름에 ‘부지’의 극존칭을 붙여 신라 최고의 신분임을 나타냈다. 이사부지, 거칠부지, 내례부지, 서질부지, 비차부지, 조흑부지가 그들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이사부지는 가야와 울릉도를 정벌한 이사부 장군이고, 거칠부지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국토를 넓히고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장군이다. 한자 표기로 김이사부는 김태종이고, 김거칠부는 김황종이다. 여기에 이사부지의 관직과 신분이 들어난다. 이사부지는 신라 골품제 최고위 관직인 대중등 이간이다. 대중등은 상대등, 이간은 이찬에 앞선 명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사부지, 거칠부지 등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편의상 한자의 훈으로 읽어도 되겠지만 이사부지, 거칠부지는 신라말을 이두적으로 표기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이사부지를 '이사압지' 거칠부지를 '거칠압지'로 읽는다. 압지는 곧 굳센 '사내'의 의미로 아버지의 줄임말이다. 세 음절의 어머니를 두 음절의 '엄니'로 부르듯 세 음절의 아버지를 두 음절의 '압지'로 줄인 말이다.
압지에는 또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으찌 뚜비 쌈의 으찌였을 것이다. 엄지척의 으뜸, 최고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런 원리를 적용하여 신라 왕족의 이름을 이두적으로 읽으면 이사압지, 거칠압지, 내례압지, 서질압지, 비차압지, 조흑압지다.
사탁부는 구지봉 김수로왕 탄생설화의 가야 왕족이다. 이름에 ‘지’의 존칭을 붙여 ‘부지’ 다음의 높은 신분임을 구분하였다. 두미지, 무력지, 도설지가 그들이다. 여기서 도설지는 추문촌(의성군) 당주이었던 도설 장군이고, 무력지는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력 장군이다. 한자 표기로 김도설지는 김도설이고 김무력지는 김무력이다. 김무력은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로 신라에 귀순하여 신주군주(경기도 광주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탁부와 사탁부, 그들의 집성촌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름에 따르면 탁부의 주거지는 냇돌이 많은 알천이었고, 사탁부의 주거지는 모래가 많은 남천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인 재매정이 바로 월성 서쪽의 남천 주변에 위치하는 것이다.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라 여느 왕보다도 존재감이 뚜렷했던 인물 이사부와 거칠부, 신라 정부는 그들에게 왕의 칭호를 붙여 묘지를 축조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은 이사부를 곱게만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사부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매우 교활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사부의 성은 김씨요 내물왕의 4대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때 연변의 관장이 되어, 거도의 권모술수를 도습하여 마희로서 가야(혹은 가라)를 속여 취하였다. (지증왕) 13년 임진에 하슬라주(강릉)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엄으로는 항복 받기 어려우니 모계로써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 하고,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서 곧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550년), 즉 태보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충북 도안?)을 함락하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충북 진천?)을 함락하였다. 왕이 두 나라 군사들이 피로에 지친 틈에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 공격하여 두 성을 취하고 증축해서 갑사를 유둔시켜 지켰다. 이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을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학계에서는 도살성을 충남 천안, 금현성을 충남 전의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가 이 시기에 충청남도 천안과 전의까지 진출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충청북도 괴산과 진천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괴산군 도안면에 도살성을 상기시키는 두타산과 도안 미륵보살상이 위치한다.
또 진천군에 금현성을 상기시키는 고구려 때 지명 금물로군과 백곡면 만뢰산에 김유신장군 태령봉이 존재한다.
이제 금관총의 주인이 밝혀졌으니 그 이름을 이사지왕릉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금관총 전시관의 표지석도 다시 세우고 안내판도 다시 써야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인 금관총 금관도 이사지왕 금관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어야 한다.
(영상제작 : 옥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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