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창열 시조
봄꽃, 열 마당
1
꽃다지
찬바람 견디려고 뽀송한 털 세운 모습
엄마 젖 물고 있는 아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노란 댕기 매고 시집갈 날 기다리네
2
산수유
눈 속에 너를 찾던 우악스런 남정네들
그래도 그 손길이 싫지는 않았던 듯
봄비에 노란 단장하고 환하게 웃고 있네
3
진달래
햇살이 굼뜬 겨울 등짝을 떠밀 때쯤
설렘과 그리움을 한가득 그러안고
분홍빛 물결 일렁이며 해맑게 미소짓네
4
백목련
겨우내 무등 타던 백설이 환생했나
순백의 배냇짓을 넋 놓고 바라본다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벅차오른 이 가슴
5
개나리
다산의 집안인가 웬 자매들 이리 많나
산에도 길가에도 일렁이는 노란 물결
눈부신 자태 자랑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6
제비꽃
동토가 깨어나고 강남 제비 돌아올 때
이 산하 어디서나 지천으로 자라나서
보랏빛 희망을 주며 힘차게 비상하네
7
동강할미꽃
솟구친 뼝대 위에 위태로이 딛고 앉아
이슬만 먹으면서 천년 세월 한결같이
봄 되면 오가는 모습 고고하다 숭고하다
8
금강초롱
고산에 옹기종기 청사초롱 불 밝히고
널 만나 가슴 설렌 산객들 인도하며
가파른 비탈일망정 삶의 절정 구가하네
9
벚꽃
드레스 지어 입고 함빡 웃는 봄의 신부
시샘하는 바람에 흩날리는 옷 조각
낭군이 올 때까지는 견뎌야만 할 텐데
10
민들레
길가에 태어나서 밟히고 또 밟혀도
한 마디 불평 없이 무리 지어 웃고 있네
무명의 민초들이여 끈질긴 생명력이여
여름꽃, 열 마당
11
찔레꽃
뒷동산 덤불 속에 하얀 향기 풍겨오면
가뭇없이 사라진 유년의 기억들이
한 통의 연서가 되어 소롯이 피어난다
12
넝쿨장미
담장을 넘나드는 유월의 진한 유혹
이끌려 다가서다 가시 보곤 멈칫하네
아서라 가까이 마라 멀리 두고 보리라
13
금낭화
바람도 숨죽이며 살금살금 걷는 뜨락
자줏빛 화장하고 조롱조롱 도열하여
반갑게 손님을 맞네 행복미소 건네며
14
이팝나무꽃
보릿고개 한창일 때 입쌀밥 쏟아지니
허기진 민초 눈엔 황금보다 더한 호강
가을엔 풍년 드소서 이밥 먹게 하소서
15
닻꽃
가는 세월 서러워 닻 내리고 하늘 보니
일렁이는 파도 대신 초록 숲 빼곡하네
숲인들 무슨 상관이랴 그대와 함께라면
16
등나무꽃
홀로서기 힘겨웠나 친구를 휘감았네
오랜 세월 감고 감다 거북등 되었지만
시원한 그늘 드리워 사랑방이 되었네
17
복주머니꽃
어릴 적 소뜯기며 동산에서 만나던 너
복덕방 문 앞에서 손님을 맞고 있네
누르면 톡 하고 터져 금전 은전 쏟아질 듯
18
개망초꽃
염천에 백설인가 놀라서 돌아보니
너무 흔해 천더기로 전전하던 너로구나
오늘은 해맑게 웃네 작은 별을 흩뿌렸네
19
등칡꽃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라도 하려는가
트럼펫 연주단이 문수성지 모여들어
우렁찬 팡파르 소리 대지를 진동하네
20
불두화
양머리 천수관음 가지마다 주렁주렁
순백의 단아함은 청정도량 기품일세
세상을 밝혀주소서 정토를 만드소서
가을꽃, 여섯 마당
21
코스모스
가녀린 몸매에 수줍음 너무 많아
바람이 고백해도 대답할 줄 모르고
딴청을 부리고 있네 먼 하늘 바라보며
22
들국화
갈바람 흰 구름과 목말 타고 뒹굴 즈음
여름날 험난했던 기억일랑 다 버리고
노란 분 단장하고서 길섶에서 미소 짓네
23
호박꽃
펑덩한 얼굴 보고 촌스럽다 비웃어도
넉넉한 모습만큼 쓰임새가 쏠쏠하다
버릴 게 하나 없으니 조강지처 네로구나
24
무궁화
단심丹心을 품에 안고 백일을 하루같이
저녁에 잠들었다 새벽이면 깨어나니
이 겨레 너를 본받아 오뚜기가 되었네
25
해바라기
거인족 피를 받아 들판에 우뚝 서서
이글대는 눈빛으로 누리를 내려보네
악당들 혼내주리라 수호신 자처하며
26
억새꽃
이 땅에 스러져간 민초들의 아우성
차마 울 수 없어 희게 웃는 건가
못다 한 정을 나누려 뺨 부비며 속삭이나
겨울꽃, 세 마당
27
수선화
여름과 가을 동안 종적이 묘연타가
늦가을에 태어나 눈 속에 윙크하네
번잡한 속세가 싫어 선계仙界를 오가는가
28
얼음새꽃
뜨거운 열기로 눈을 뚫고 나왔구나
이리저리 휘둘리며 보신에 급급한 삶
찬바람 앞에 당당한 너를 보니 부끄럽다
29
홍매화
세상에 맺힌 한이 뼛속에 사무쳤나
눈 속에 부복한 채 산 부처가 다 되어서
희붉은 속살을 열어 자리이타自利利他 향 피우네
* 옥창열
수필가/시조시인
석교시조문학상/경기문학인대상 수상
앎이란 무엇인가1,2/가슴에 사랑을 심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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