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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수필 낭송/옥창열
TV를 안 본 지가 오래됐다. 그런데 식구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재미있다며 기함을 하는 바람에 유튜브에서 찾아보게 되었다. 유튜브에는 TV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이 거의 다 들어있어 시간 맞추어 TV 앞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제목이 특이하여 이게 뭔가 했는데, 궁녀를 뜻하는 말이었다. 옛날 궁녀들은 소매 끝동을 붉은 천으로 덧댄 옷을 입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임금의 후궁이자 첫사랑인 성덕임이 주인공이었다.
십수 년 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이산’이 있었는데, 그때는 덕임의 본명이 알려지지 않아 성송연으로 나왔다. 송연의 출신은 도화서 화원이었는데, 실은 궁녀가 맞는다고 한다.
덕임의 아버지는 혜경궁 홍씨 친정의 집사였는데, 덕임이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면서 생각시가 되어 대궐로 들어갔다. 마침 딸 둘을 시집보내고 적적해하던,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이 그녀를 딸처럼 길렀다 한다.
세손 정조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차 들르다가, 단정하고 총명하던 생각시와 눈이 맞았다. 일찍이 아비 사도세자를 비명에 잃고 살얼음판을 걷던 범생이 세손의 가슴에 불을 지핀 첫 여인이자 의지처였다.
열네 살 사춘기 세손이 한 살 아래 덕임에게 처음 고백하자, 덕임은 아이가 없는 세손빈에 예의가 아니라며 거절한다. 왕위에 오르고, 첫 구애로부터 15년이 흐른 뒤에 다시 대시했는데, 이번에도 거절당하자 공연히 덕임의 동무를 벌주면서 소란을 피웠고, 할 수 없이 덕임이 마음을 연다.
곡절 끝에 임금의 여인이 되고 아들과 딸이 태어나니, 그때까지 자식이 없던 정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귀하게 얻은 아이들이 요절하고, 상심한 덕임마저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네 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정조는 덕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친정 부모에게 종 2품 벼슬과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탕약을 손수 처방하면서 온갖 사랑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임금의 여자가 된 후 대여섯 해 반짝 행복을 누리다가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진정 인명은 재천인가.
드라마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날씨가 조금 풀리는 날을 잡아 덕임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덕임과 아들 문효세자는 원래 대궐의 발치인 용산 청파언덕에 나란히 묻혔다는데, 일제가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서삼릉은 서울 북쪽 고양시에 있는데, 조선 시대 후궁들과 태실 수십 기씩을 한데 모아 놓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화성의 융건릉에 묻혔지만, 다행히 아들이 덕임이 곁에 있어서 덜 외로울 것 같았다.
덕임의 묘에 세워진 묘비명墓碑銘 뒤에는 정조가 덕임을 그리워하며 몸소 쓴 장문의 추모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 나라의 군주가 아닌,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과 슬픔을 담았다.
‘... 되돌아보니, 내가 무료할 때 빈과 이야기하면 서로 더욱 뜻 이 맞고 정다웠다. 이로써 마음 한가운데가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참으로 속이 탄다….’
구구절절 애절한 마음이 배어난다. 빼어난 외모에다 못하는 게 없고, 착하고 어질며 슬기롭고 예의 바르고 권세를 삼가고 도리를 지키고 나눌 줄 알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콩깍지가 씐 남자의 글이긴 하지만, 금슬이 좋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의빈宜嬪이란 빈호도 신하들이 지어 올린 글자를 물리치고 임금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덕임의 반듯한 필체를 보면 재기 넘치는 여인이었던 것 같다.
덕임은 정조가 평생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한 여인이다. 한낱 궁녀에게 왕으로서 승은承恩을 내린 게 아니라 남자 대 여자로서 진심 어린 청혼을 하고 사랑을 주었다는 뜻이다.
미인과 천재는 신이 사랑하여 일찍 데려간다더니 덕임이 그러한가. 때로는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타협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살 수도 있으련만, 한 여인의 박명한 삶이 그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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