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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탈무드는 ‘아이가 가급적 어릴 때 무덤을 보여주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면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사는 용인에 옛 명사들의 무덤이 많아서 차례대로 순례하고 있다.
이번에는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허균의 무덤을 찾았다. 요즘은 포털에서 길 찾기를 하면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그런데 용인이 꽤 넓어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오리털 파카로 완전 무장을 했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좋았다.
미평리에 내려서 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가르쳐준 대로 길을 가는데, 아까 길을 가르쳐준 분이 차를 몰고 쫓아와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덕분에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 차비를 주려 하니 안 받겠단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복을 쌓았나 보다.
허균의 무덤은 난개발로 어수선한 용인 땅 한 귀퉁이에 있었다. 굴다리를 지나고 작은 공장을 지나고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허균 묘소’ 이정표가 보였다. 입구에 양천허씨 묘역 이장 기념비가 서 있고, 야트막한 야산에 신도비랑 허씨들 무덤이 드문드문 산재한 묘역이 나왔다.
맨 위쪽에 양천허씨의 시조 단소壇所가 마련되어 있고, 그 아래로 큰 벼슬을 한 분들의 무덤이 있었다. 비문이 마모되어 해독이 쉽지 않았으나, 허균의 아버지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허엽, 형들인 이조판서 허성과 창원부사 허봉의 무덤이 있고, 끝자락에 주인공의 무덤이 보였다.
허균은 문제의 인물이다. 시문詩文의 천재로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어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광해군 때 서얼들이 일으킨 반란에 연루되어 거열형(능지처참)을 당했다. 벼슬이 정 2품 좌참찬에 이르렀으나 시대의 반항아적 기질을 타고나 불교 승려와 교류하고 기생과 교감하고 하층민들과 서슴없이 어울렸다.
제대로 된 국문鞠問도 없이 모함을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행적을 감안하면, 실제로 홍길동전에 나오는 것과 같은 혁명적 사상을 가졌던 것 같다. 능력이 아니라 출신성분을 따지는 부조리에 항거했고, 무리와 함께 공모하여 민심을 교란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역모죄로 걸린 듯하다.
붓을 들면 천변만화한 이야기꾼으로 변신하여, 서자 신세를 비관하던 길동의 한을 풀어주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글로써 풀어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과감한 개혁을 지향했지만, 이상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한 채 산화하고 말았다.
그가 누운 봉분의 잔디는 많이 말라 죽고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나 곧 허물어질 것만 같다. 돌비석도 깨지고 파여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단아도 이제는 말이 없다. 그가 소설에서 이상사회로 그렸던 율도국에서 부디 안식을 찾기 바란다.
허엽의 무덤 앞에 선 묘표墓表는 허리에 금이 가 있었는데, 아들 허균이 죽은 후 해를 입었다가 후세에 이어붙인 거란다. 전·후면의 글씨는 각각 양사언과 한호가 쓴 것이라는데, 그러고 보니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다.
묘역 입구에는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본명 허초희)의 시비가 서 있다.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찬사를 받은 천재 여류시인인데, 고부간 불화와 친정의 겹친 화액으로 불운한 삶을 살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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