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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우리 아파트에 공작단풍이 절정이다. 공작새가 날개를 드리운 듯한 수형樹形인데, 늦가을에 단풍이 불타오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면 봄꽃보다 아름답다는데 이를 두고 이르는 것만 같다.
올해는 하는 일 없이 바빠서 가을 산행을 못 했다. 솔직히, 전에 무리하다가 족저근막염에 걸려 고생한 이후로 산악회에서 연락이 와도 겁이 나서 못 간 적도 있다. 아직 두 눈 멀쩡한데 조물주가 내린 단풍 천국을 건너뛰다니 아쉽다!
단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래전 뉴욕에서 어학 연수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도 단풍이 유명하지만, 미국 또한 그에 못지않다. 땅덩이에 비해 인구가 적으니 공기가 맑고, 공기가 맑아야 단풍이 곱게 물든다.
나는 시간 여유가 있는 연수 기간에 여행을 실컷 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는 뉴욕을 연수지로 선택했다.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뉴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남북으로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다.
뉴욕시의 맨해튼 중심부에는 호수를 가운데 두고 남북 10리, 동서 5리 정도 되는 거대한 중앙공원Central Park이 있는데, 이곳에도 가을이 오면 오크나무 단풍이 곱게 물든다. 소풍 나온 연인이나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자연을 즐기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허드슨강을 건너면 뉴욕주가 펼쳐진다. 웨스트포인트에는 맥아더 장군이 졸업한 전통의 미 육사가 있고, 통일교주 문선명 가족이 사는 대궐 같은 집도 있다. 계속 북상하면 캐츠킬 산맥Catskill Mountains이 나오는데, 워싱턴 어빙이 초기 네덜란드 이민자 전설을 토대로 쓴 단편소설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의 무대다.
저 소설은 독학하던 시절, 오 헨리의 『첫사랑』First love과 함께 내가 직접 번역했던 적이 있어서 연수 기간에 꼭 현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차를 가진 연수 동료와 외국인 동급생을 꼬드겨서 드라이브했는데, 그때도 길옆으로 가을 단풍이 온통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립은 이웃 일은 발 벗고 나서면서도 집안일은 등한시하는 사내다. 어느 날, 마누라 바가지를 피해 사냥총을 지고 캐츠킬 산맥으로 들어갔는데, 낮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20년이 흘러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더라는 이야기다.
캐츠킬 산맥을 지나 이태커의 코넬 대학까지 울긋불긋 천지를 물들이던 단풍을 추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코넬은 『코스모스』Cosmos를 저술한 칼 세이건 교수가 가르치는 대학인데, 그런 천혜의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제3 수필집 『워낭 소리의 추억』(2021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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