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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백세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결혼을 두세 번 하는 사람이 늘어날 거라 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해로하라'던 결혼식 주례사도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법은 일부일처제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 제도가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유교 문화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혈통 계승을 중시하여 축첩문제에는 관대하였던 것 같다.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존경받는 공자와 맹자가 첩이 있었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와 율곡도 첩이 있었다고 한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임종 때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는데, 사후 한 달 만에 재혼해 버리는 바람에 율곡이 상심하여 일시 스님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나중에 첩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들였다고 하니....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던 일반 민중에게 축첩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한 명의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만도 버거웠을 터. 삶이 팍팍하니 부부간에 오가는 말도 천박하였지만, 서로 말을 존대하던 양반집 부부보다 정은 오히려 두터웠다는 말이 있다.
무슬림 국가는 합법적으로 4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데, 놀랄 것 없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지방호족과의 결혼정책을 빌미로 29명의 부인에게서 25남 9녀를 두었다.
"남자의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 데 있다"
부인이 무려 500명이었다는 칭기즈칸이 부하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전투를 앞두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한 말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들어야겠다. 부인 숫자만 놓고 보면, 대제국을 건설한 불세출의 영웅이 희대의 난봉꾼으로 전락할 판이다. 왕건도 마찬가지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정복지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략일 수가 있어 무조건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18세기 카메룬의 소수부족인 반투스 왕국의 바이콤왕은 나이 100살 때까지 500여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콩고의 열대우림 속 소수부족인 바크바 왕국의 르켕왕은 800명의 아내를 거느렸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정략이라기보다 민권의식이 낮은 지역에서 무소불위 권력에 의해 자행된 횡포다. 중세 유럽의 영주들이 결혼하는 신부와 첫날밤을 먼저 보냈다는 '초야권'과 비슷한 경우 아닐까?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류태영 박사(건국대 부총장 역임)가 이스라엘 유학시절에 정통파 유태인의 집을 방문했는데, 주인 영감이 4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다. 시앗 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데, 아내가 4명이면 맨날 지지고 볶지 않겠는가 싶어 물어보니, 제일 나이 많은 첫째는 어른 대접을 받고, 둘째는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며, 셋째는 돈을 맡아 관리하고, 제일 어린 막내는 남편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으며 서로 사이좋게 산다고 하더란다.
류 박사에게도 아내가 몇 명인지를 묻길래 당연히 한 명이라고 하였더니, 신의 축복을 좀 더 받으시라면서 측은하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류 박사는 사회학이 전공이라 풍습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프리카 여행길에 17쌍이 집단 결혼생활을 하는 원시부족을 보게 되었다. 밤에 잠자리는 어떤 식으로 누워서 자나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17쌍이 한꺼번에 누워서 자는 건 아니고 리더가 짝을 일주일씩 교대로 바꾸어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원주민이 류 박사에게 "당신네는 결혼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당연히 일부일처다"라고 했더니, "그런 미개한 성 풍속이 있느냐? 한 사람과 지루해서 평생을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하더란다. 그 원시부족인의 생각으로는 문명사회인 우리의 일부일처제가 고루해 보였던 모양이다.
인류학자 머독(G.P.Murdock)의 조사에 의하면, 일부일처를 고수하는 경우는 대략 25% 정도에 불과하고, 70%는 일부다처제라고 한다. 나머지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한 여자가 남편을 둘 이상 거느리는 일처다부나 복수의 남녀가 공동 결혼하는 집합혼, 티베트에서 한 여자가 형제 여러 명과 한꺼번에 결혼하는 형제 공동결혼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한 명 이상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복혼제(polygamy) 사회에서도 대다수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13세기 몽골군에 쫓겨 고려로 들어온 거란족을 전국 각지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는데, 이 거란족의 풍습에 한 여자가 여러 명의 서방을 거느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일처다부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너희가 공평하게 돌볼 수 있다면 너희들은 선택에 따라 2~3명 또는 4명의 여인을 아내로 삼아 그들을 돌볼지어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여러 아내에게 공정하게 대할 능력이 없다면 한 사람의 아내만 두어라."
이슬람교를 개창한 마호메트가 코란 제4장 제3절에서 한 말이다. 마호메트 자신이 4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지만, 전쟁이 잦았던 중동지역에서 과부와 고아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복지정책으로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게 허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부일처나 일부다처와 같은 결혼 풍습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나름의 이유가 있어 생겨난 관습으로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도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도 어느 지역의 결혼풍습을 논할 때, 어느 한 가지 잣대로 재단하여 왈가왈부하지 말고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일부일처제가 가장 이상적인 혼인형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다른 형태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 제2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 2』(2019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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