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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20세기 불멸의 팝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 우리 나이 또래면, 기타를 맨 채 다리를 덜덜 떨며 로큰롤을 부르던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미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전설이자 신화였다.
1990년대 초반 미국 연수 시절에 동부에서 서부까지 횡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엘비스가 살던 곳은 중동부에 위치한 테네시주의 소도시 멤피스. 주도州都는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슈빌로, 엘비스가 즐겨 부른 로큰롤은 컨트리뮤직과 흑인음악을 섞어놓은 거란다.
그가 살던 집은 그레이스 랜드라는 백악관 풍 대저택이다. 자가용 경비행기와 승용차는 물론 생전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가구와 골든디스크가 오롯이 전시되어 있고, 정원의 편편한 돌비석 아래에 그가 부모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극장 안내원과 트럭 운전사를 하다 가수로 배우로 입지전적인 성공 신화를 썼다. 아메리칸드림을 대리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인지 미국인의 열렬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한때 주한 미군에서 복무하여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마치 뼈가 없는 듯 아랫도리를 흐느적거리고 엉덩이와 허리를 돌리면서 춤을 추는 것이 전매특허인 가수. 그런 저속함과 통속성, 그러면서도 눈부시게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으로 슈퍼스타가 되었다. 훤칠한 외모와 폭발적인 쇼맨십,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끝에 세 번의 그래미상을 받았고, 컨트리뮤직과 가스펠뮤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마약을 하지 않았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에 성공한 뒤에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꾸준히 많은 기부를 했으며, 팬들에게도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주변 친구 중에 그로부터 고급 승용차를 선물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 그의 수입은 당시 잘 나가던 프랭크 시내트라 등 톱 연예인 3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단다. 사망 후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각종 음반, 기념품 수입이 연간 수백억 원 수준.
이러한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공연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지자 외로움을 타던 아내가 태권도 도장의 사범과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 것.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애도가 지나쳐 정치는 내팽개친 채, 자제 위의 미소년을 시켜 후궁을 겁간하게 하였다가 최후를 맞은 공민왕처럼 그도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한때 화를 참지 못하여, 아내를 앗아간 남자를 청부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친구의 만류로 포기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건강이 악화하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1977년 42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애도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그는 대중문화계의 영웅이었지만, 그런 영웅도 실연의 상처만은 비켜 가지를 못했다. 참으로 나약한 것이 인간이던가!
국가유적으로 등록된 그레이스 랜드는 팬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곳으로, 미국에서 백악관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 개인 주택이라 한다. 1층은 전시실로, 2층은 외동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 제3 수필집 『워낭소리의 추억』(2021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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