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수 48 회
옥 창 열
월드컵 축구대회로 한동안 지구촌이 열병 앓듯이 들썩였다. 이번 월드컵은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에서 개최되어, 대부분 경기가 새벽 시간에 열렸다. 직장인들은 좀 곤란하겠지만, 나는 은퇴한 몸이라 새벽에도 가끔 일어나 TV로 중계되는 경기를 보았다. 많은 사람이 축구로 하나가 되는 걸 보면서 새삼 축구의 위력을 느꼈다.
우리나라 팀을 열심히 응원했는데, 아쉽게도 16강에 들지 못하고 탈락하여 그 뒤로는 재미가 시들해졌다. 이기면 재미있지만 지면 영 개운치 않은 게 스포츠 경기다. 잠이나 잘 걸 괜히 보았나 싶기도 하다.
며칠 지나니, 브라질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강전에서 브라질이 독일에 7대 1로 참패하자 실망한 팬들이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브라질 마피아는 자국 공격수를 부상시킨 콜롬비아 선수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가 독일에 1대 0으로 패한 후에는 아르헨티나 곳곳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축구경기장 폭력 사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40년대 이후 축구 과격 팬인 훌리건의 난동에 의해 유럽과 남미에서 사망한 사람만 400여 명이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역전패하자 관중 2명이 권총 자살하고, 2명은 심장마비로 사망한 적이 있었다. 1969년에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축구 경기 끝에 전쟁을 벌였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선수 에스코바르가 자국 마피아의 총에 피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포츠란 언제든 이기고 질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지나친 행동을 하는 걸까? 스포츠를 스포츠 자체로 즐길 수는 없는 것인가? 자국이 이기면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졌을 때는 이긴 쪽을 축하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왜 보여주지 못하는가?
2002년 한 · 일 월드컵 때는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 전 국민이 환호하고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4강전 때는 무려 7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응원전을 펼쳤는데, 당시 안전 활동에 직접 참여했던 입장에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이기면 문제없겠지만 질 경우 실망한 군중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다혈질인 브라질 사람들처럼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기는 쪽이야 좋겠지만 지는 쪽 국민은 얼마나 실망하게 될까? 이번에 이긴다고 계속 이길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오락에 불과한 축구 경기의 승패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아무래도, 스포츠가 상업성에 물들어 거액의 상금과 개런티가 오가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에 돌아가는 상금만 자그마치 3,500만 달러, 한화로 355억 원이라 한다. 잘 나가는 선수의 개런티도 상상을 초월한다. FIFA 자체가 거대한 이익집단이 되고 말았다.
어학 연수차 뉴욕에 체류 중이던 1993년 겨울에 브라질을 여행했는데, 당시 브라질의 인플레가 연간 4,000%였다. 자고 나면 아이스크림값이 오르는 식이어서 현지인들은 누구나 미국 달러를 선호하고 자국 화폐는 쓰레기 취급을 했다. 내가 공부하던 반에 브라질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경제가 그 모양이니 영 안쓰러워 보였다. 나라가 부강해야지 축구 하나 잘한다고 알아주는 게 아니다.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계속 이기기만 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포츠든 인생사든 계속 잘 나가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승패는 돌고 돈다. 그나마 승률을 높이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포츠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 중 하나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둑, 장기 같은 잡기나 영화, 연극도 마찬가지다. 재미와 오락으로 그쳐야 한다. 이기면 좋지만 지더라도 흔쾌히 승복하고 승자를 축하해줄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 필요하고, 최선을 다한 패자는 승자 못지않게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면, 지나친 개런티와 포상금제부터 시정해야 한다. 승자와 패자의 대우 차이를 너무 크지 않도록 하자. 국제경기에 나가 메달을 따면 평생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도 장차 국민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사소한 승패에 집착하여 귀중한 재원을 낭비하지 말자. 혹시라도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표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란 스포츠 경기에서 한두 번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기든 지든 만족할 줄 아는 삶이며, 만족할 줄 모르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지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왜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가 되었겠는가!
* 첫 수필집 『앎이란 무엇인가』(2015년)에 수록
다음 동영상
총의견 수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이용가능합니다.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