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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여름, 중국 산동성의 유교 유적지를 답사한 기행문입니다.
2015년 초, 퇴직자단체 잡지에도 기고한 바 있으나, 뜻있는 분들의 요청으로,
사진과 낭송을 곁들인 실감 있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다시 나누고자 합니다.
옥 창 열 제공/수필가, 시조 시인
출 발
공자는 지난 2,500년간 동양문화권의 사회질서 규범을 만든 유교의 개조이며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분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오래 전부터 그의 고향을 찾아 발자취를 느껴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멀리 떨어진 기독교와 불교 성지를 먼저 돌아본 뒤 가장 늦게서야 가게 되었다.
공자의 고향은 중국 산동(산둥)성 곡부(취푸)인데, 여행지로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지 여행사마다 곡부행 상품은 있으되 최소인원이 차지 않아 출발 확정된 것이 없었다. 여름에 여행사에 부탁을 해두었더니 가을이 되어서야 성원이 되었다며 연락이 와서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은 산동성 성도인 제남(지난)과 공자의 고향인 곡부, 맹자의 고향인 추성(쩌우청), 그리고 태산을 함께 둘러보는 것으로 3박 4일의 비교적 짧은 여정이었다.
제남 명소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니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산동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산동성 성도 제남에 도착했다. 참으로 가까운 거리다. 산동성의 기온은 서울과 비슷한데 강우량이 적어 벼농사보다는 밀농사를 주로 지으며, 산에 나무가 듬성듬성 난 것이 꼭 스페인 풍경처럼 메마른 인상이었다.
제남은 인구 570만의 공업도시로 우리나라 울산처럼 연중내내 공기가 뿌연 날이 많다 한다. 산동성 전체 인구는 9,400만으로 우리 남한의 2배다. 일단 머리쪽수로 기를 죽인다. 공자시대에 이곳에는 임치(현재 치박, 제남 북쪽 300리)를 수도로 제나라가, 곡부(제남 남쪽 400리)를 수도로 노나라가 있었다.
산동성 동부 해안도시인 청도와 위해 등지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외자기업이 들어와 산동성의 GDP는 중국내 2위라 한다. 고속도로도 시원하게 잘 뚫려 있었는데, 총연장이 3천km로 중국내 선두를 달린다고 한다. 고대에는 산동반도 동쪽에 동이족이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인구의 99%가 한족이라 한다.
제남 도착 첫날과 마지막날 황하와 대명호, 포돌천 공원 등을 둘러보았다. 황하는 듣던 그대로 강물이 온통 누런 황토빛이었는데, 그래도 어망을 던져 고기잡는 사람이 있었다. 대명호는 항주의 서호 비슷한 도심내 호수공원으로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공간이었다. 포돌천 공원에는 유명 문인의 시와 화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우리 민족이 활쏘기와 음악같은 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면 중국민족은 시와 회화같은 정적인 재능이 뛰어난 듯했다.
유교 성지
이튿날, 제남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 반 정도를 달려 공자(BC 551-479)의 탄생지인 곡부에 도착했다. 옛 노나라의 수도로, 지금은 인구 60만의 관광도시였다. 공자 고향이 아니었다면 가난한 농업도시에 불과했을 거라고 한다.
곡부에는 공자의 사당인 공묘와 공자가문의 자손이 거주하던 공부, 공자가문의 묘지인 공림이 있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유교가 국가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천하제일가문’이란 현판과 전답을 내려 보호하였고, 사당도 제후에 준하는 규모로 지어 공묘내의 대성전(大成殿)은 중국내 3대 궁전 건축물이라 한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도 다른 사상가들은 모두 열전에 실었으나 공자만은 제후들의 전기인 세가(世家)에 실었다. 공묘와 공부 주변은 성곽으로 둘러쌌고, 공림도 엄청나게 넓고 따로 성곽으로 둘러싸서 중국 역대 왕조가 공자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알수 있었다. 역대 황제들 다수가 이곳을 참배했다고 하는데, 특히 청조 건륭제는 여덟 번이나 이곳과 태산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그 외 공묘에는 공자가 아들 공리에게 시와 예를 가르쳤다는 정자가 남아있고,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여러 번 고사하고 새싹을 틔워 다시 자란 것이 현재 수령 수백년이라 한다.
공림에는 공자와 아들 공리, 손자 자사를 비롯한 후손들이 묻혀있으며, 3,600여 개에 달하는 비석과 황제들이 참배 때 머물던 정자가 남아있다. 공자묘는 공림의 제일 안쪽에 있는데, 바로 옆에 공자의 제자 자공이 6년간 시묘살이 하던 단칸집이 남아있다. 툭하면 스승을 고발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요즘의 세태가 부끄럽다.
가이드 말로는, 공자는 고대인으로서는 매우 큰 190cm의 거인으로, 들창코에다 이마와 앞니 두개가 튀어나온 형상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무척 영특하였고, 배움을 즐겼다.
노나라의 하급관리(창고지기, 가축사육)로 출발하여 법무장관격인 대사구에 이르렀으나 정변이 일어나 사직했으며, 제자들과 14년간 천하를 주유하다 돌아와 73세로 사망할 때까지 3천명의 제자를 길렀다. 최초의 사학으로 6가지 커리큘럼(禮,樂,射,御,書,算)을 확립했는데, 문무가 구분되지 않던 시대라 공자 자신도 글공부는 물론이고 활쏘기(射)와 전차 말몰이(御)를 익혔고,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과목을 모두 가르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 중에 재상과 대부(성읍을 식읍으로 받음)를 비롯한 훌륭한 관리와 교육자가 많이 나와 공자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모두 제자를 잘 두어야 스승이 빛이 나는 모양이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곡부에서도 동남쪽으로 70리쯤 떨어진 니구산 기슭으로 방향 표시만 있을 뿐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체적으로 관광지가 두루뭉술한 느낌이다. 기독교나 불교 성지에 가면 탄생-수행-전교-입적 등 생전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지목되어 성지화되어 있는데, 유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실감이 좀 떨어지고, 관광객도 대부분 중국 내국인들이고 외국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곡부에서 남쪽으로 반시간 정도 더 내려가면 맹자의 고향인 추성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규모는 공자 유적지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맹묘(아성묘), 맹부, 맹림이 잘 정비되어 유교의 4서 3경 중 하나인 맹자의 저자이자 유교사상가중 공자 다음으로 중요한 맹자를 기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란 뜻에서 지성(至聖)이라 부르고, 맹자는 두 번째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이라 부른다. 건물 이름도 공묘에는 지성전, 맹묘에는 아성전이 있었다.
맹모삼천지교의 고사(故事)로 유명한 맹자 어머니의 묘가 추성에서 곡부 방향으로 20여리 떨어진 길 옆에 있다는데 가보지 못했다.
공묘와 맹묘에는 수령이 수백 년 이상 되어보이는 향나무와 황제들이 방문할 때마다 만들어 세운 비석들이 즐비했다. 비석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 때 두 동강 났다가 도로 붙인 것들이었다.
공부는 공자가문의 장손들이 거주했는데, 마지막 77대 손이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비어있었다. 곡부와 추성을 합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는데, 공맹의 덕이 살아있는 고장이란 뜻으로 널리 쓰인다.
한편 유교는 가이드도 이야기했지만,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에 가까워 유학이라고도 불린다. 공자와 맹자 사당에 인물상을 모셔놓고 향불을 피우며 허리를 굽히긴 하지만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정도의 의식이지 절대자인 신을 부르며 구원을 바라는 그런 종교적 의식과는 다르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조상의 영혼과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아직 능히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고 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도 다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답했다.
공자는 사후세계처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제사를 올려야 마땅한 조상이외의 다른 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꾸짖었으며, “귀신을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는 말라”고 했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유교는 그야말로 산 자의 종교요, 사상이요, 규범이다.
셋째 날, 곡부-제남 사이의 태안시에 위치한 태산에 올랐다. 태산(1,545m)은 중국의 5대 명산과 5대 악산(嶽山)중 으뜸으로 치는 산이다. 중국민족이 옛부터 신령한 산으로 숭배한 성산(聖山)인데, 이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에 위치한데다 역대 제왕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봉선 의식을 거행한 산이었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한무제 등 12명의 황제가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하늘에 알리기 위해 정상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했고, 72명의 제후들이 황제의 명령으로 정상에서 봉선의식을 올렸다 한다. 공자, 두보 등 많은 유명인도 이산 정상에 올랐고, 지금도 매일 평균 5만 명의 중국인이 이곳에 오른다고 한다. 우리가 간 날도 정상 부근에 사람이 부딪힐 정도로 많았다. 태산은 황하,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적 심벌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안식을 제공하고 있는 듯하다.
정상에는 옥황상제를 받들며 봉선의식을 거행했던 사당이 있고, 정상 바로 아래에는 도교사원과 2천 년 전에 지어져 보수를 거친 식당 등 건물들이 즐비하다. 7천여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등산로가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군데에 설치된 케이블 카를 이용하여 오른다. 태산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시조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에도 나오는 산이지만 높이는 우리나라 태백산(1,567m)과 비슷한데, 산동성 내륙의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실제보다 훨씬 높아보인다. 산동성의 산들이 대부분 나무가 듬성듬성한 험한 산인데, 거기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무가 많고 바위도 많아 경치가 그런대로 볼만 했다. 가을바람이 부니 태산에도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태산밑에는 황제들이 태산에 오르기 전에 유숙하던 궁전과 천지와 태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대묘(岱廟)가 있었다. 한대에 세워지고 송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고대 궁전 건축양식으로 우리의 불국사 경내 정도의 넓이이다. 경내에 있는 천황전은 곡부 공묘의 대성전,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손꼽힌다. 또한 경내에는 한무제가 심었다는 한백(漢栢)을 비롯하여 수령이 1천 년을 넘어 2천 년은 될 듯한 향나무와 측백나무가 즐비하다.
귀 국
나흘간의 여행일정이 금방 지나갔다. 좀 짧은 듯한 느낌이다. 마지막 날, 대묘 관광을 끝으로, 활기차게 그 땅을 오가는 공자의 후예들을 뒤로 한 채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산동성 바로 서쪽의 하남성에는 노자와 장자의 유적, 황제 헌원 탄생지, 소림사, 낙양 등 유서깊은 곳이 있어 같이 연결해서 보면 좋은데 그런 여행상품이 없었다. 천상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중국여행은 이번이 다섯 번째였는데, 갈 때마다 거대한 스케일에 놀란다. 영토든 인구든, 궁전이든 풍경이든, 인물이든 역사든…. 어쩌다 경제가 뒤처지기는 했지만 공자를 비롯한 걸출한 사상가들과 문인들을 배출하고 동양의 역사를 주도해온 그들이 경탄스럽다.
그런데 이런 중국의 찬란한 문화에 지금은 중국민족에 동화되어버린 우리 동이족의 기여가 있었다. 주왕조 앞의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고 공자도 은의 후예로 동이족이며, 심지어는 한자도 동이족이 발명했다고 하지 않는가. 유교가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도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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