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서 경강선으로 갈아타고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종점인 여주역에 내렸다. 역사 안에 붙은 여주 관광지도를 보니, 오늘 목적지인 신륵사와 세종대왕릉 외에도 명성황후 생가와 파사성, 고달사지, 이포보가 눈에 띈다.
버스를 타려 밖으로 나갔는데,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 바로 잡아탔다. 택시를 타고 말을 붙이면, 기사분이 현지 관광정보를 미주알고주알 친절하게 일러준다. 도자기 축제 현수막이 보여서 물어보니, 바로 옆의 이천뿐 아니라 여주도 옛날부터 백자와 쌀밥이 유명하다고 한다.
여주대교를 건너면서 보니, 강 너머 신도시 쪽에 아파트가 즐비하다. 다리 건너 동쪽으로 가면 신륵사가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이번에 야당 대선 후보 된 이가 지청장으로 근무했던 수원지검 여주지청이 나온단다. 여주지청 앞을 흐르는 강 맞은편에 성군으로 이름 높은 세종대왕릉이 있는데, 그 정기를 톡톡히 받은 듯하다.
신륵사 입구에 내리니, 봉미산신륵사라고 쓰인 일주문一柱門이 눈에 들어온다. 절은 보통 산간에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강변 평지에 자리 잡았다.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대찰이었다는데 중간에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어째 쥐 파먹은 뒤주처럼 썰렁하고 다소 초라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절의 중심인 극락보전만큼은 제법 웅장했다. 그 앞의 다층석탑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인데, 보기 드물게 힘찬 비룡이 조각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양식이 가미된 것이라는데, 세종대왕릉이 근처에 조성되면서 이곳을 원찰願刹로 삼아 중수한 흔적인 듯하다.
옆으로 돌아가니 조사당祖師堂이 나오는데 지공, 나옹, 무학 세 고승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그 앞뜰에는 수령 600년 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향나무는 제를 올릴 때 피우는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의미가 있다.
조사당 뒤 계단을 오르면 고려 말 불교를 중흥시킨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나온다. 신륵사는 나옹이 입적한 곳으로, 부도까지 오르는 계단 숫자가 그의 향년인 57에 맞춰져 있었다.
부도는 큰 석종 모양으로, 통도사 진신사리 부도의 금강계단처럼 높다란 기단 위에 놓여 있다. 부도 비문은 고려 말의 문장가인 이색이 지었다는데, 세월의 침식으로 파손이 심하다. 부도 앞에는 비천상을 새긴 아름다운 석등이 세워져 있다. 원래 석등은 불탑이나 부도, 사대부 묘지 앞에 놓여 공양의 불을 밝히는 헌등獻燈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나옹은 중국에 유학 후 공민왕의 왕사가 된 고승으로, 그가 썼다는 선시가 여럿 남아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의 청산가인데, 한때 절에만 가면 이 낭송이 울려 퍼졌다.
부도를 보고 걸어 내려오니 금방 강변 절벽의 암반이 나오고, 짙푸른 강물이 보인다. 남한강은 여주를 지나면서 아름답다고 하여 여강麗江이라 불리는데, 그 여강의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서 있다. 전탑은 기단을 높게 쌓아 멀리서도 쉽게 보일 수 있게 만들어 강을 오가는 배들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몇 개 남지 않은 전탑으로, 모진 풍파를 견뎌내고 오늘도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다.
탑 바로 밑에는 나옹의 당호를 딴 강월헌江月軒 정자가 서 있는데, 경관이 수려하다. 절벽 아래로 세월을 잊은 듯 유유히 강물이 흐르고, 시원한 강바람을 받으며 황포돛배가 지나간다. 여강의 시원한 백사장과 강줄기, 그리고 멀리 보이는 여주 평야가 가히 일품이다. 코로나로 인해 피곤한 심신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듯하다.
정자 바로 옆, 나옹을 화장한 다비터에는 합장하듯이 나지막이 삼층석탑이 자리한다. 뜬구름 같은 삶, 부질없는 집착을 버리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라 하던 선사의 가르침이 탑신塔身으로 서 있다. 돛배를 타고 강을 오가던 민초들이 저 탑을 보며 위안으로 삼고 험한 세파를 헤쳐나갔으리라.
절 구경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다가 지나가 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음 목적지인 세종대왕릉으로 달렸다. 점심시간이 늦어, 능 부근 음식점에서 묵은지 쌀밥을 사 먹었다. 돼지고기를 조금 넣고 끓인 찌개에다 반찬이 열 가지가 넘을 정도로 푸짐했다. 여행 중에 현지 토속음식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식사 후에 천천히 걸어서 세종대왕릉으로 들어갔는데, 명성답게 왕릉 중에서도 규모가 으리으리하고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능 입구에 세종의 동상이 서 있고, 당대에 발명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 많은 과학기구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 그는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숱한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군이다. 그가 이곳에 누워 있어 여주와 신륵사가 더 빛나는 듯하다.
세종대왕릉 옆으로 한참 걸어가니, 효종대왕릉도 나왔다. 효종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대동법을 시행하고 북벌을 계획했던 왕이다. 효종릉은 봉분이 둘인데 세종릉은 하나라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분께 물어보니, 세종은 소헌왕후를 합장하여 그렇단다. 합장한다는 건 부부 금실이 각별했다는 뜻이 아닐까. 세종은 후궁이 11명에 자녀가 22명에 달한 걸로 아는데, 정치 못지않게 집안 건사도 잘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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